1660년 10월17일 런던 한복판 채링크로스. 귀족과 전직 의원 4명이 교수형틀에 걸렸다. 사형수 가운데 고매한 인품으로 유명한 인사가 포함돼 동정론이 없지 않았지만 누구 하나 입도 뻥긋하지 않는 가운데 형이 치러졌다. ‘감히 왕을 시해한 대역죄인의 죄를 끝까지 밝혀내라’는 국왕 찰스 2세(사진)의 엄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왕당파가 파악한 대역죄의 핵심인물들은 104명. 찰스 2세는 특히 59명에 깊은 증오를 보였다. 올리버 크롬웰이 찰스 1세의 처형에 미온적인 의원들을 감금한 채 1648년 12월 개회한 의회 재판에서 처형에 서명한 의원들의 명단은 곧 다른 명칭을 얻었다. ‘블랙리스트.’
숨죽여 관망하던 의회파에서는 불만이 적지 않았다. 대다수는 국왕 찰스 2세가 약속을 위반했다고 여겼다. 망명 왕자로 네덜란드에서 머물다 영국으로 돌아오기 직전 찰스 2세는 분명히 유화적인 모습을 보였다. 의회에는 ‘누구든 지난 잘못을 용서하고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노라. 세금과 법령의 문제는 의회에 맡기겠노라’는 편지(브레다 선언)를 보냈으니까. 국왕의 본심은 즉위 4개월 만에 제정된 ‘면책과 사면법’으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났다. 용서하되 아버지를 죽인 대역죄인들만큼은 예외라고 못 박았다.
국왕의 분노와 증오는 모든 걸 바꿨다. 찰스 1세 처형에 서명했던 의원 59명의 명단은 ‘자유를 위한 왕정 타도의 공신록’에서 대역죄인을 가늠하는 ‘블랙리스트’가 됐다. 영국인들은 반신반의했으나 1660년 10월부터 권세가들의 목이 줄줄이 처형대에 걸렸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59명 가운데 13명은 사형 선고, 25명은 종신형을 받았다. 이미 사망한 반역자는 관에서 시신을 꺼내 다시 죽였다. 찰스 1세 처형 12주년에 맞춰 1661년 1월 말 부관참시된 크롬웰의 목은 24년 동안 창대에 걸렸다.
‘블랙리스트’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찰스 2세의 정치보복은 강했으나 짧게 끝났다. 동생인 제임스 왕자가 주장한 존 밀턴(실낙원의 저자·크롬웰의 핵심참모)의 처형도 ‘눈이 머는 벌을 받았으면 됐다’며 물리쳤다. 특별한 치적도 없고 검소하지도 않았던 찰스 2세가 그나마 민심을 잃지 않았던 이유는 보복과 정쟁을 전면화하지 않았던 덕인지도 모른다. 찰스 2세가 잠깐 활용했던 블랙리스트는 시간이 흐를수록 다양하게 퍼졌다. 한국에서는 다르면 틀리다고 매도하는 블랙리스트가 떠돌았다. 과거인 줄만 알았더니 신종 블랙리스트가 등장했다는 소리까지 들린다. 해법은 하나뿐이다. 상호 인정과 지도자의 관용.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