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양국 정부가 22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완전 종료를 앞두고 임시방편이나마 지소미아 종료와 수출규제를 놓고 서로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데는 한미일 안보 협력관계 훼손에 대한 우려가 큰 미국이 막판에 한일 양국을 뒤에서 압박한 영향이 컸다. 이에 더해 청와대와 외교·국방·산업부가 동시다발적으로 미국과 일본의 카운터파트와 돌파구 마련을 위해 뛴 점도 파국으로 치닫던 한일관계에 잠시 숨통을 틔워줬다.
이날 오후 청와대의 발표 직후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끊임없는 대화와 소통, 그리고 막판까지 아슬아슬한 조정에 의한 결과”라며 “예를 들면 어제도 청와대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열렸고 오늘도 열렸다. 그만큼 막판까지 유동적이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또 이 당국자는 “한국과 일본이 끊임없는 커뮤니케이션으로 서로의 입장을 주고받았다”고 설명했다. 미국의 역할을 묻는 질문에는 “다른 나라의 역할에 대해 직접적으로 해석하기는 곤란하다”면서도 “미뤄서 다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외교가에 따르면 이날 한일 양국이 막판 진통 끝에 내놓은 결과물은 전날 밤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부 장관이 전화통화를 할 때와도 다른 것으로 전해졌다. 하루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한국과 일본, 미국의 숨 가쁜 물밑 대화와 접촉이 진행됐다는 뜻이다.
먼저 지난 18일 김현종 청와대 안보 2차장이 미국으로 직접 날아갔다. 현지에서 김 차장은 백악관 관계자 등과 접촉해 지소미아 종료와 관련한 우리 입장과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어느 만큼인지 자세히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과정에서 김 차장은 미국 측에 일본의 태도 변화를 유도해달라는 요청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미국 측에서 데이비드 스틸웰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등이 한일 양국의 입장을 일본 현지에서 조율한 것으로 전해졌다.
외신들 역시 미국 압박이 상당했다고 분석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이날 결정에 대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두 동맹국에 그들의 분쟁이 미국의 지역 안보 네트워크에 타격을 주는 것을 막으라는 압력을 가한 뒤에 나왔다”고 전했다.
외교·국방·산업부 등 유관 부처도 ‘따로 또 같이’ 움직였다.
외교부는 장차관부터 실무 과장급까지 한일 문제에 ‘올인’하다시피 했다. 조세영 1차관은 이달초 극비리에 일본을 방문했고, 국·과장급은 격주로 일본 측과 접촉 했다. 국방부에서는 정경두 국방 장관이 지소미아 파국 막기에 나섰다. 정 장관은 최근 태국에서 개최된 아세안 확대 국방장관회의(ADMM-Plus) 참석을 계기로 고노 다로 일본 방위상, 마크 에스퍼 미 국방장관과 양자·3자회담 등을 진행했다. 심지어 그는 18일 밤 방콕에서 고노 방위상과 비공개 회동을 하는 등 수차례 밀담을 했다. 정 장관은 우리 군내에서 보기 드문 일본통으로, 일본어에도 능통하다. 국방부 관계자는 “그동안 한미 안보협의회(SCM)를 계기로 미국 측 주요 인사와 협의와 접촉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소미아 종료 결정의 배경을 설명했다”며 “일측의 태도 변화도 요청했다”고 설명했다.
산업통상자원부도 부산하게 움직였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오늘은 특별히 산업부 장관도 NSC 상임위에 참석하도록 했다”며 “NSC 상임위원들 간의 논의 과정에도 직접 참여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막판 교섭으로 한일은 일단 파국을 피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언제든지 양국이 다시 부닥칠 가능성은 여전하다. 한일 갈등의 근본 원인인 강제징용 배상판결과 관련된 진전이 없기 때문이다. 외교 당국자는 “강제징용 문제의 경우 한일 총리회담 당시 설명했던 부분에서 주목할 만큼 논의가 이뤄지지 못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강 장관은 이날 오후 늦게 주요20개국 외교장관회의를 위해 나고야로 떠났다. 강 장관은 23일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무상과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