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뮤지컬 ‘파우스트’ 앙상블로 데뷔한 16년차 배우 박송권은 아들인 라마메스를 통해 이집트의 왕권을 차지하려는 집정관 조세르 역으로 무대를 누볐다. 지금의 행복은 결코 쉽게 얻은 게 아니다. 허리 통증을 참기 위해 진통제를 먹고 견디면서 치른 ‘아이다’ 초연 오디션 땐 앙상블 겸 라다메스 커버로 합류했다. 이후 매 시즌마다 ‘아이다’ 오디션을 봤다. 너무 젊다는 이유로, 이미지가 아니다는 이유로 연달아 오디션에서 낙방했다.
이번 다섯 번째 시즌을 끝으로 ‘아이다’의 브로드웨이 레플리카 버전 공연이 종료된다는 소식을 접한 박송권의 마음은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떻게 해서든 ‘조세르’ 역을 따내고 싶었다. 의상은 물론 외모도 수염을 기른 채 등장했다. 자신 있는 한마디도 던졌다. “‘뽑아주시면 잘 할 자신이 있다. 아니 지금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말하며 호소했다. 결과는 ’합격‘ 이다. 연출가는 “잘 성장해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서 좋다”는 말을 하며 그의 성실함과 실력을 인정했다.
초연과 지금의 조세르는 조금 달라졌다. 박송권은 “좀 더 표현적으로 보여지는 톤이 아니라 실질적인 그 인물이 가지는 내면과 상황에 더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처음 조세르란 인물을 표현할 때, 너무 장면이 없었던 까닭에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이야기가 전개돼 고충이 있었다. ‘조세르’의 내면에 한 걸음 더 다가간 박송권은 “2중적인 조세르를 어떻게 보여줄지 고민해서, 최대한 표정과 몸짓 등 나를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을 찾았다”고 말했다.
박송권이 소화한 조세르는 달랐다. “조세르가 저렇게 멋있는 역할이었구나”를 깨닫게 해준 배우이기도 했다. 그는 “조세르는 탐욕스러운 사람이기보다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있는 전략가적인 인물이다”고 분석했다. 그렇기에 “방법은 안 좋을지라도 그가 가진 신념을 결코 ‘화’로 풀어선 안 된다”고 덧붙였다.
“나만이 더 부강한 이집트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서 아들과 공주를 대할 때도 전략적이다. 전략가니까 뒤에서 명령을 한다. 속으로는 열을 받아도 태연한 척하면서 상대를 설득한다. 내 아들이 왕이 되어야 왕권의 실무를 내가 할 수 있으니 거기에 필요한 계획을 다 세워놓는 것이다. 또한 조세르도 라다메스와 같은 사랑을 했던 과거 역시 있었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 조세르는 파라오를 독살하고 아들 라다메스를 통해 이집트의 왕권을 차지하려는 계략을 드러내는 넘버 ‘어나더 피라미드’(ANOTHER PYRAMID), 아들 라다메스와의 갈등이 절정에 달하는 넘버 ‘라이어 파더, 라이크 선’ (LIKE FATHER, LIKE SON)두 곡 안에서 스토리와 가창력을 동시에 보여줘야 한다. 박송권은 “쉬운 배역은 없었지만 조세르 노래 두 곡이 너무 어렵다. ”며 “ 텐션을 50부터 시작해야 겨우 소화할 정도이다”고 말해 고강도 넘버임을 알게 했다.
“초반부터 노래가 설득력이 없어지면 어렵다. 노트르담 드 파리의 ‘우리는 이방인’처럼 에너지가 계속 쌓이는 노래다. 텐션 1에서 시작하면 100으로 끝나는 게 아닌 텐션 50으로 시작해서 100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할까. 내가 원하는대로 소리와 박자가 잘 컨트롤이 되었을 때 짜릿하다. 변동폭이 크게 없이 상위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관객이 AR튼거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할 때 열심히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박송권이 대중들에게 인정받은 시기는 뮤지컬을 시작한 지 10년 이상이 지난 뒤이다. 2015년 뮤지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바람사)에서 노예장으로서 눈물 흘리면서 포효하는 역할을 맡자, ‘희망의 아이콘’이라 불렸다. 10년 넘게 앙상블을 해서 배역으로 올라가는 배우가 없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앙상블 배우가 배역을 맡았다고 해서 꽃길이 펼쳐지는 건 아니다. 그는 “조연으로 올라섰을 대 맞닥뜨린 편견 앞에서, 남아있는 옛 기억을 깨끗하게 깨는 작업을 해야했다”고 털어놨다.
“개천에서 용난다고 하죠. 이젠 그럴 말이 통용되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작품을 하다보면 회사에서, 또 음악감독, 연출에겐 앙상블했던 막내라는 편견이 남아있다. 시간이 지나 배역을 맡게 됐지만, 또 다른 벽을 느꼈고 인정의 범위를 깨야한다는 걸 깨달았다. 올라가면 끝이 아니더라. 다시 내려와야 한다. 참 배우가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나와 싸워야하고 무대 위에서 관객과 기싸움을 해야 한다. 몸으로 부딪쳐서 나도 바꾸고 그들도 바꿔놔야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박송권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 배우다. 그는 “그만두고 싶었다가도 점점 알아봐 주고 인정해줘서 다른 길이 열린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도 조금씩 기로가 온다. 늘 선택을 해야하는 직업이다. 43살인데 이제 앞으로 길어야 10년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무언가 결정해야하고 자리를 잡던지 놓던지 해야 한다. 그걸 준비하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포기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스스로를 잘 알아야한다. 그는 “후배들이 힘들다고 또 배고프다고 아무거나 주워먹지 말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무대에서 당당해지려면 무대에 많이 서봐야 하는 건 맞지만, 힘들다고 아무거나 해서는 안 된다. 제가 바라는건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다. 다음 작품을 할 때 지금보다는 수월했으면 좋겠다. 제가 할 수 있는 배역이면 무조건 할거고 욕 안 먹을 자신이 있다. ”
앙상블의 산증인인 그가 후배들에게 해주는 말은 귀담아 들을만한 가치가 있었다. 특히 “커버리허설이 또 다른 기회가 될 것이다”고 강조했다.
“이게 그냥 커버리허설이 아니라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후배들에게 한 적이 있다. 잘해도 못해도 그만이 아닌 오디션이 아니다. 눈 부릅뜨고 덤벼야 하는 리허설이 바로 커버리허설이다. 분명히 못하지만 않으면 회사에서 눈여겨본다. 지금이 아닌 다음에라도 기억한다.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배역을 욕심 내라는 말이 아닌, 자신에 온 기회를 귀하게 생각하면 좋겠다”
그의 신조는 ‘무대에서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이다. 뼈 아픈 경험담을 통해 터득한 지혜이다. 한때 너무 잘하고 싶어서 욕심이 앞설 때가 있었다. 즉 가슴보다는 머리가 앞서는 연기를 했다. 이를 본 선배가 그에게 한마디 했다. “머리 말고 가슴으로 연기해”라고. 그 한마디는 연기할 때마다 그의 가슴을 치는 말로 기억에 남았다.
무대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값진 가르침으로 남았다. 그는 영혼 없는 육체로 무대에 선 결과 스스로에게 너무나 부끄러웠던 경험담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작은 배역으로 올라섰다 다시 앙상블을 하게 됐을 때 대혼란과 혼돈이 왔단다. 처음엔 배역으로 들어갔다가, 알고 보니 앙상블인 걸 알고 자괴감에 빠졌던 순간을 경험했다. 그는 “모든 장면에 나왔는데 어느 순간 무대에서 장난을 치고 어디론가 숨으려고 하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고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그런 그의 머리를 날카롭게 강타한 이는 후배였다. 후배는 그에게 ‘오빠 요즘 (무대에서)안 멋있어’란 한마디만을 남겼다.
“사람들이 도대체 언제 나오냐고 물어보면서 (놀랐다는 듯이) ‘앙상블이었어?’라고 한마디씩 할 때마다 너무 힘들었다. 그러면서 존재감이 사라지고 장난친다고 관객에게 욕도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후배가 “오빠, 요즘 안 멋있어”라고 하더라. 단순한 장난처럼 들리지 않았다. 점점 의문이 커졌고 내 안에 파고들어 와서 내가 안 멋있는 이유를 고민을 시작했다. 내가 열심히 하던 모습을 알던 친구라 정말 반성을 많이 했다.“
그 뒤로 그는 어떻게 하면 무대에서 무겁게 서 있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고 했다. “어느 날 내가 서 있는 한 원을 내 것으로 못 만들면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한 공간을 내 것으로 무겁게 서 있으려고 노력했다. 어느새 감정이 묵직하게 되더라. 그러면서 갑자기 세명의 관객분이 선물을 주면서 사인해달라더라. 무대에서 제가 보이냐고 물으니 너무 잘 보인다고 하더라. 이 작품에서 저를 처음 보게 됐다는 말도 하셨는데, 그 말을 듣고 많은 걸 느꼈다. 그 뒤로 함부로 무대에 서지 않는다. 배우로서 큰 도약이었다. 그 뒤로 무대에서 저를 속이지 말야야겠다는 생각을 쭉 하고 있다.”
뮤지컬 배우 박송권의 꿈은 남우조연상을 받는 것이다. 돈도 아니고 상도 아닌 ‘인정’을 받고 싶은 게 배우 마음이니 더더욱 그러하다. 가끔 연말 시상식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도 일화도 들려줬다.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붓고 난 연기 열정을 시상식 무대에서 인정받는 배우들을 보면서 너무 부러워서 눈물이 날 때가 있다는 것.
“가끔 시상식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 배우가 상을 타서가 아니다. 나도 미친 듯이 한 연기와 감정을 느껴보고 싶어서이다. 그런 연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그들이 부럽다. ”
올해 목표는 영화계 진출이다. 영화를 볼 때마다 엔딩크레딧을 끝까지 다 보고 나온다는 박송권은 “뮤지컬에서 캐릭터를 바닥까지 몰입해서 하는 것과 영화 카메라 앞에서 하는건 다를 것 같다”며 스크린 연기를 동경했다.
“캐릭터에 미쳐보고 싶은데 영화는 오디션을 볼 기회가 없다. 항상 바라만 보는 거다. 사극영화든 독립영화든 영화의 세계를 경험하고 싶다. 뮤지컬에서 올인했던 캐릭터의 감정과는 또 달리 영화에서 어디까지 감정을 쏟을 수 있는지 스스로 확인해보고 싶다. 작은 역이든 상관없이 영화 카메라 연기를 꼭 한번 경험해보고 싶다.”
[사진=양문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