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스포츠 문화

'목동'의 이상향 찾아...꼬리 무는 전시

세계적 작가 듀오 '펠레스 엠파이어'

亞 첫 '여기에도, 나는 있다'전시회

유럽식 청자-복사·붙이기 구현 등

시공 초월한 작품들 '오묘한 매력'

펠레스 엠파이어의 아시아 첫 개인전 ‘여기에도, 나는 있다’ 전경. /조상인기자펠레스 엠파이어의 아시아 첫 개인전 ‘여기에도, 나는 있다’ 전경. /조상인기자



동양의 비색청자를 서양에서는 ‘셀라돈(celadon)’이라 부른다. 그 기원은 종교전쟁 시기 유럽에서 활동한 프랑스 작가 오노레 뒤르페(1567~1625)의 전원풍 소설 ‘라스트레(L’Astree)‘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설에서 아스트레라는 여인을 사랑하던 주인공 목동 셀라돈은 연한 녹색의 리본을 달고 다녔다. 소설이 오페라 무대로 옮겨졌을 때 셀라돈은 초록색이면서도 푸른색과 회색을 띠는 암녹색 옷을 입었다. 유럽인들에게 청자의 오묘한 빛깔은 곧 ‘셀라돈’이다.

서울 종로구의 갤러리 바라캇 컨템포러리에 이 셀라돈들이 함께 놓였다. 루마니아 태생의 바바라 볼프와 독일 출신 카타리나 스퇴버로 이뤄진 작가 듀오 ‘펠레스 엠파이어’가 아시아 첫 개인전을 위해 선보인 신작이다.

펠레스 엠파이어 ‘셀라돈1’ /사진제공=BARAKAT 바라캇컨템포러리펠레스 엠파이어 ‘셀라돈1’ /사진제공=BARAKAT 바라캇컨템포러리


해 뜨면 초원에서 양떼에게 종일 풀을 먹이고 해 질 무렵 집으로 돌아와 하루를 마무리하는 목자 셀라돈의 삶은 자연의 섭리에 부합하는 ‘이상향’이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마음 편히 꽃구경을 다니기도 어려운 우리 눈에만 부러운 게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유토피아로 전해 내려온 ‘아르카디아’ 역시자연 그대로의 삶을 누리는 목동들이 사는 곳이었다. 작가들은 청자 장인들이 완벽한 ‘이상향’의 청자를 만들기 위해 무수히 도자기를 깨뜨렸다는 사연에서 이름 말고도 그 둘이 갖는 접점을 찾았다.


펠레스 엠파이어는 독일 베를린의 공방에서 도자기를 구웠다. ‘아름다운’ 청자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참외·복숭아·개구리·원숭이 등 청자 모양은 다양하지만 서양인인 그들에게는 형태가 갖는 의미가 중요치 않았다. 전시된 도자기들은 고려청자보다는 목동 셀라돈과 더 비슷해 보인다. 골똘히 고민하거나 명상하는 모습, 여유롭게 비스듬히 누운 것부터 통곡하듯 무너져 내린 것까지 사람을 더 닮았다. 작품명 ‘유(YU)’는 명맥 끊긴 고려청자의 비법을 찾아 평생 매달린 도예가 유근형(1894~1993)의 삶에서 영감을 얻었기에 붙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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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스 엠파이어의 도자기 신작 ‘유(YU)’와 ‘셀라돈’(왼쪽)과 ‘클레오파트라’ 전시 전경. /사진제공=BARAKAT 바라캇 컨템포러리펠레스 엠파이어의 도자기 신작 ‘유(YU)’와 ‘셀라돈’(왼쪽)과 ‘클레오파트라’ 전시 전경. /사진제공=BARAKAT 바라캇 컨템포러리


9점의 청자와 맞은 편에 걸린 목동 작품의 목에는 녹색 밧줄이 리본처럼 달려있다. 녹색 밧줄과 대구를 이루는 붉은 밧줄은 클레오파트라를 죽음으로 몰고 간 뱀의 이미지로 옮겨간다. 클레오파트라는 영국 극작가 톰 스토파드의 희곡 ‘아르카디아’에 등장해 다시금 이상향의 목동, 셀라돈으로 연결된다. 전시제목 ‘여기에도, 나는 있다’는 루브르박물관 소장품이자 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생의 1628년작 ‘아르카디아의 목자들’ 속 비석에 새겨진 문구를 차용했다. 인류사의 시공을 초월해 27점의 작품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펼쳐진다.

동료이자 룸메이트였던 두 작가는 지난 2005년 루마니아의 고성을 다녀온 후 함께 활동하기 시작했다. 수백 개의 방을 가진 ‘펠레스 성’은 르네상스·바로크·로코코·고딕·아르데코 등의 다양한 양식이 위계 없이 뒤섞여 있었다. 19세기 오스만제국에서 갓 독립한 루마니아 왕족이 국가 정체성을 과시하고자 한 의도가 감지됐다. 작가들은 이 성의 공주방을 촬영한 후 실제 크기로 출력해 자신들의 프랑크푸르트 아파트 거실 벽면에 붙이고, 낡은 가구들이 놓인 작은 아파트를 ‘펠레스 제국’이라 명명했다. 작가들은 이곳에서 ‘위클리 살롱’이라는 일종의 바(Bar)를 운영했고 새로운 협업과 실험으로 급부상했다. 지난 2017년 유럽 최고 권위의 국제 공공예술제인 ‘뮌스터 조각프로젝트’에 초대받았을 때도 이들은 작은 바를 꾸며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펠레스 엠파이어의 개인전 ‘여기에도, 나는 있다’ 전시 전경.펠레스 엠파이어의 개인전 ‘여기에도, 나는 있다’ 전시 전경.


펠레스 엠파이어의 개인전 ‘여기에도, 나는 있다’ 전시 전경.펠레스 엠파이어의 개인전 ‘여기에도, 나는 있다’ 전시 전경.


현대미술에서 탄생한 ‘장소 특정적 예술’을 즐겨 구현하는 작가들답게 이번 전시에는 갤러리 바닥을 촬영해 A3크기 544장으로 출력했다. 얼룩덜룩한 에폭시 자국과 바닥에 비친 천장 조명까지 그대로 담아 바닥과 벽이 똑같은 공간으로 만들었다. 작가들은 이런 ‘복사하고 붙이기(copy and paste)’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차이, 곡해와 오류에서 가치를 찾는다. ‘혼종성(hybridity)’을 중시해 “본질적으로 다른 것들의 섞임에서 오는 긴장감을 작업의 원동력으로” 삼는 이들의 매력은 다름에서 발견하는 새로움이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전시 관람은 사전예약 후 가능하다. 고화질의 ‘VR전시투어’도 제공된다. 4월 26일까지.


조상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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