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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띄운 작은 목소리들...무한히 떠돌뿐 사라지지 않는다

[박상진의 문학으로 쓰는 이야기]

■이탈리아 작가 클라우디오 마그리스

'다뉴브' '작은 우주들' 등 작품으로 유럽 문학상 휩쓴 작가

"문학은 이젠 사라져버린 것에 대해 귀 기울이고 말하는 일"

일상 속 미세한 모습 예리하게 관찰, 인간 존재방식 드러내




작가 마그리스

현대 이탈리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클라우디오 마그리스는 슬로베니아와 국경을 맞댄 트리에스테의 혼종적 정체성을 지닌 채 평생을 살았다. 그는 1937년 트리에스테에서 태어나 잠시 토리노에서 대학을 다닌 시기를 제외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1978년부터 트리에스테 대학에서 독일 현대문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자, 에세이스트, 번역가, 소설가, 정치가 등으로 다양하게 활동했다. 마그리스의 이름은 우리에게 아직 낯설지만, 유럽에서는 어지간한 문학상은 다 휩쓴 작가다.


마그리스는 세계화와 같은 큰 단위에 치이는 지역의 작은 공간을 관찰한다. 그의 섬세한 눈은 안이 밖을 품는 방식으로 부지런히 큰 단위를 향하고, 우리를 둘러싼 일상의 작은 공간의 정체성을 세상을 비추는 거울로 삼는다. 대표작 ‘다뉴브’는 다뉴브 강의 수원지에서 시작해 흑해에 이르는 흐름을 따라가며 다양한 맥락들이 얽힌 중부 유럽의 풍성한 그림을 그려낸다. 그의 여행기는 민족, 언어, 문화, 국가의 경계를 드나드는 움직임으로 채워진다.

이탈리아 작가 클라우디오 마그리스./EPA=연합뉴스이탈리아 작가 클라우디오 마그리스./EPA=연합뉴스


‘작은 우주들’

‘작은 우주들’은 ‘다뉴브’와 비슷한 맥락에서 쓰였다. 마그리스는 평범한 일상에서 경험하는 미세한 모습들을 예리하게 관찰한다. 그들은 잊힌 혁명가, 네보소 산에 사는 곰, 웅덩이에 버려진 개, 돌, 물결, 눈, 안개, 국경 검문소와 같은 구체적인 사물부터 풍경과 시간의 관계, 모든 종류의 경계를 넘나드는 흐름, 불확실한 정체성, 죽음의 그림자처럼 추상적인 이미지까지 걸친다. 눈을 돌려야만 시각에 맺히고 마음에 들어오는 사소한 것들이 인간의 존재 방식이라는 보편적 문제와 날실, 씨실처럼 짜이면서 마그리스의 작은 우주를 구성한다.

‘작은 우주들’의 첫 장은 1914년 트리에스테의 바티스티 가(街) 18번지에 문을 연 산마르코 카페에 관한 이야기다. 이탈리아 반도의 북동쪽 끝에 자리한 트리에스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을 당시 이탈리아의 역사적 기억과 민족적 정체성 위에서 영토를 되찾고자 했던 ‘영토 회복주의’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트리에스테는 1920년에 이탈리아 영토로 들어왔지만, 국경 너머 외부의 흔적들은 지금까지도 강하게 남아있다.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바티스티가(街) 18번지에 위치한 산마르코 카페.이탈리아 트리에스테 바티스티가(街) 18번지에 위치한 산마르코 카페.


산마르코 카페는 지역의 지성인과 학생들이 즐겨 찾으며 저마다의 혼종적 정체성을 풀어내는 곳이 되었다. 마그리스도 단골이었다. 그는 카페에 앉아 셀 수 없이 다양한 목소리가 교차하는 광경을 묘사한다. 수많은 목소리는 크기나 분위기, 속도, 간헐성 등에서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출항을 앞둔 늙은 선장, 시험 준비와 사랑에 골몰하는 학생, 주변에 무감각한 체스게이머, 호기심 어린 눈의 관광객, 와인을 마시며 신문을 읽는 사람, 시대의 사악함을 통탄하는 노인, 괴로운 결혼 생활을 토로하는 사내. 여기에 환호처럼 튀어 오르는 병뚜껑들이 있다.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하면 누군가 받아 이어간다. 누구는 중부 유럽의 문화를 이야기하고 누구는 학위 논문을 고치며, 누구는 영토회복주의를, 누구는 노아의 방주를 이야기한다. 각양각색의 활력이 산마르코 카페를 압도한다. 마그리스는 어느 특정 집단의 동일성에 점령된 카페가 있다면 그것은 삶을 부정하는 사이비 카페라고 말한다. 마치 현란한 교향곡이 끝나고 난 뒤 여러 악기들의 잔향이 귓가에 아련히 남듯, 산마르코 카페를 채우는 목소리들은 발성되는 순간 사라지지만 또한 오랫동안 남아 마그리스의 마음에 새겨진다.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의 국경지대에 걸쳐 있는 항구도시 트리에스테의 전경.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의 국경지대에 걸쳐 있는 항구도시 트리에스테의 전경.


목소리의 시각적 이미지


마그리스는 ‘우주를 떠도는 우리 영혼은 목소리로 남는다’고 생각한다. 목소리는 죽음의 힘도 미치지 못하는 무한의 파장이다. 마그리스는 어떤 소설가가 들려주는 욥의 자식들 이야기에서 작은 파편으로 부서진 목소리를 듣는다. 욥이 시련을 당하다 마침내 해피엔딩을 맞는 이면에 놓인, 사막 바람에 휩쓸려 폐허가 된 집에서 죽어간 양떼 같은 그의 자식들이 내는 목소리다. 자식들은 아버지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해서만 존재할 뿐인 구차한 엑스트라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였을까. 욥의 독자 가운데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 왜냐하면 이름 없는 자들의 운명과 자신을 동일시한다면 삶이 너무나 힘겨워질 테니까.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아무리 작아도 우주에서 무한히 떠돌 뿐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그들을 외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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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작가 보르헤스는 끝도 없이 새로운 세상이 모험심을 자극한 어떤 사람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사람은 세상을 그리려 작정하고 오랜 세월 동안 돌아다니며 보았던 산, 만(灣), 배, 섬, 물고기, 집, 도구, 별, 말, 사람의 이미지로 한 공간을 채운다. 죽기 직전, 그는 그 선들의 미로가 그려낸 것이 세상이 아니라 자기 얼굴의 이미지임을 발견한다. 마그리스 역시 산마르코 카페에서 잡아낸 작은 목소리들이 결국 자신의 목구멍에서 나온 것임을 깨닫고,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가는 그 수많은 목소리 가운데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한다. 그들을 외면하는 것은 곧 자신을 외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마그리스는 자신의 얼굴을 더 똑바로 보기 위해 목소리들을 눈앞에 재현한다. 나지막이 속삭이는 또는 쾌활하게 떠드는 목소리들은 담배 연기 속의 먼지 같은 비정형의 파편으로 떠돌아다닌다. 마그리스는 그들을 마치 자기공명영상이 종을 횡으로 자른 단면을 보여주듯, 순간순간마다 멈춰 선 모습으로 시각화하여 우리 앞에 보여준다. 그리하여 목소리들은 시간이 멈춘 허공에 걸린 이미지로 선명하게 나타나고, 우리가 저버리거나 놓치기 쉬운 사소한 파장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 이미지로 새겨진다.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1898~1967)의 작품 ‘제논의 화살(1964作)’. 마그리트는 바다 위에 멈춘 커다란 바위의 이미지로 제논의 정지된 화살의 역설을 표현한다.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1898~1967)의 작품 ‘제논의 화살(1964作)’. 마그리트는 바다 위에 멈춘 커다란 바위의 이미지로 제논의 정지된 화살의 역설을 표현한다.


허공에 정지된 현실

사냥꾼이 평소처럼 활을 메고 사냥을 나간다. 저만치 어슬렁거리는 사자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오자 활을 내려 시위를 당긴다. 이를 눈치챈 사자는 죽기 살기로 사냥꾼에게 덤벼든다. 사냥꾼은 도약하여 공중에 뜬 사자의 이마를 향해 화살을 날린다.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게 조준된 화살은 목표를 향해 정확히 날아간다. 화살과 사자는 가까워진다. 여기서 잠깐. 그 가까워지는 거리를 반으로 나눠보자. 그리고 그 나눠진 거리를 다시 반으로 나누고, 그렇게 나눈 거리를 다시 또 반으로 나누고…. 나눠진 거리는 한없이 줄어들고 무한대로 수렴하지만, ‘0’이되지는 않는다. 화살과 사자 사이의 거리는 짧아질 뿐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화살과 사자는 무한수렴의 궤도에 실린 채 공중에 멈추고, 화살은 결코 사자의 이마에 박히지 않는다.

허공에 멈춘 화살과 사자를 눈앞에 그려보면 얼마나 비현실적인 그림인지 느낄 것이다. 그리스 철학자 제논이 제출했던 유명한 역설이다. 실제로 날아가는 화살의 운동은 순간으로 나뉠 수 없다. 날아가는 운동은 시간의 흐름에 실려 진행되기 때문이다. 다만 그 날아가는 궤도를 이미지로 나눠볼 수 있을 뿐, 순간에 정지된 화살과 사자는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이미지다. 화살은 여지없이 사자의 이마에 박힌다.

일본 에도시대에 활동한 대표적인 목판화가 가츠시카 호쿠사이가 제작한 목판화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일본 에도시대에 활동한 대표적인 목판화가 가츠시카 호쿠사이가 제작한 목판화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


문학의 비현실적 현실성

19세기 일본 목판화의 중심 주제였고 자포니즘의 열광적인 대상이었던, 공중으로 치솟아 오르며 부서지는 파도의 정지된 이미지는 일본 특유의 미적 감각, ‘비타이(媚態)’라 불린다. 하지만 파도는 공중에서 영원히 그 상태로 정지되지 않는다. 그런 일은 현실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화살이 사자의 이마에 박히듯, 파도는 바다로 떨어진다. 그런데 현실은 이렇게 우리 눈앞에서 당연한 듯 일어나고 아마도 잊히겠지만, 우리가 마음에서 재구성한 비현실적인 그림은 깊이 새겨져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는다.

제논의 역설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철학, 수학, 신학, 문학 등 여러 분야에서 ‘해결’되었다. 마그리스가 산마르코의 카페 허공에 건 목소리의 잔영은 문학적 해결의 한 예다. 마그리스를 인용하면 “문학이란 부재에 대해, 이제 없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말하는 일이다.” 사라진 부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다. 화살이 날아오던 그 궤도, 파도가 솟구치던 그 찰나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회고하는 일이다. 아마도 우리는 시간에 매인 존재로서 과거를 돌아보며, 과거의 순간들을 이어 맞추며 살아가는 존재이리라. 이마에 화살이 박힌 사자가 땅바닥에 나동그라지고, 파도가 바다에 떨어져 철썩이는 현재는 사자와 파도가 공중에 떠있는 여러 조각의 과거 순간들로 지탱된다.

목표에 도달해 맛보는 쾌감은 목표 가까이에 이르면서 그 도달의 가능성을 즐기는 쾌감보다 확실히 덜하다. 실현된 순간은 꿈꾸던 과정을 없었던 일로 되돌릴 수 없다. 화살은 날아가는 동안에, 파도는 공중에 떠있는 동안에, 그들 고유의 희열을 유지한다. 제논의 역설은 대상에 영원히 다다르지 못하는, 혹은 다다르지 않는 상태를 음미하는 비현실의 세계를 제공한다. 당신이 현실 속에서 때로는 비현실적일 필요가 있다 생각된다면, 제논의 역설을 문학적으로 해결하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마그리스가 공중에 띄운 목소리들의 비현실적 모자이크는 당신이 자꾸 잊어버리는 사소한 것들이 사실은 당신 자신의 얼굴임을 깨닫게 해준다. <부산외국어대 교수>

최성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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