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시절 청산리 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이범석 장군의 제48주기 추모제가 오는 11일 오전 10시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다.
국가보훈처는 11일 이범석 장군 묘전에서 열리는 추모제는 (사)철기이범석장군기념사업회가 주관하며,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유족과 사업회 관계자 등 20여명이 모여 간소하게 거행된다고 8일 밝혔다.
1900년 10월 20일 서울 용동에서 출생한 이범석은 1915년 여운형의 권유로 중국으로 망명했다. 망명 후 민족지도자 신규식의 주선으로 운남강무당(雲南講武堂)에 입학해 기병과(騎兵科)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3·1운동 소식이 알려지자 그는 독립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장교직을 그만두고 신흥무관학교의 고등군사반 교관으로 취임해 독립군 장교 양성에 주력했다.
1920년 4월에는 왕청현에 있는 북로군정서로 옮겨 사관연성소를 창설한 뒤 600여명의 생도들을 독립군 장교로 교육하고 부대의 전투 역량 강화에 기여했다. 이는 당시 독립군 전사 가운데 가장 찬란한 전과를 올린 청산리 대첩의 기반이 된다.
이범석은 1920년 10월 21일 보병 1개 대대를 인솔하고 청산리 백운평에서 유리한 지형을 이용함으로써 일본 토벌군 주력 부대를 강타해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는 대전과를 올렸다. 이후 김좌진 장군과 함께 북로군정서군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10여 차례 격전을 치러 큰 승리를 거뒀다.
1940년 9월 17일에는 한국광복군 창설에 참여해 참모장으로 임명됐다. 이후 광복군 총사령부의 핵심 부대라 할 수 있는 제2지대장으로서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합작해 국내 진공작전 수행 계획을 세우는 등 항일투쟁을 적극 전개하다 광복을 맞았다.
1946년 6월 3일 500여명의 광복군 동지들과 함께 인천항을 통해 조국에 돌아온 그는 조선민족청년단을 결성해 민족국가 건설에 힘썼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에는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으로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국군 창설과 육성에 크게 공헌했다.
그는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으며, 1972년 5월 11일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