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연한 하늘 아래 사방이 굽이굽이 초록의 향연이다. 한낮 햇살을 피할 목적으로 고택 대청마루 위에 걸어둔 새하얀 광목 천이 이따금 하늘 위로 두둥실 떠오른다.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온 바람 한줄기가 무심히 지나가는 중임을 알리는 수신호다. 바람이 이리 조심스레 지나가도 산속 적요함은 종종 쉬이 사라진다. 작은 새들이 자꾸만 바람결에 지지배배 사연을 실어 하늘로 띄우기 때문이다. 하늘·산·바람·새… 현실에 펼쳐진 한 폭의 수채화다.
세상만사 제쳐 두고 쉬고 싶은 날 잠시 머물다 가기에 제격인 전북 완주 오성 한옥마을을 찾았다. 1,200여년 전 부처님께 공들일 절터를 찾아 북에서 남으로 걷고 또 걷던 도의선사가 마침내 마음을 빼앗기고 멈춰 섰던 곳이다.
그랬을 만하다. 완주 소양면에 위치한 오성 한옥마을은 말 그대로 병풍 같은 산들에 둘러싸여 있다. 도의선사가 산속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는 것을 확인한 후 더 남하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 이름 지었다는 종남산(終南山)을 비롯해 서방산·위봉산·원등산이 마을을 에워싸고 있다. 울창한 산림뿐이 아니다.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맑은 계곡과 깊은 호수가 지역 산세에 수려함을 더한다.
그림 같은 자연 속에 둥지를 튼 오성 한옥마을은 이십여채의 한옥으로 구성돼 있다.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집은 아원고택이다. 경남 진주의 250년 된 한옥을 그대로 가져와 종남산 산자락 끝에 이축했다. 갤러리와 현대식 건물도 함께 배치했다.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아원고택은 지난해 여름 글로벌 아이돌 그룹인 BTS(방탄소년단)의 뮤직비디오 ‘2019 써머 패키지 in 한국’에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됐다. 고즈넉한 곳에서 쉼표를 찍고 싶은 사람들뿐 아니라 ‘핫플(유명장소)’ 방문 인증을 하고 싶은 BTS 팬들에게도 주요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다. 단 아원고택은 유료 숙소다. 잠깐 들렀다 가고 싶은 사람들은 투숙객이 쉬는 시간을 피해 오전11시~오후5시 사이 갤러리 입장권을 구입하면 방문 가능하다.
BTS 덕분에 유명해진 곳이 완주에 또 있다. 오성 한옥마을 인근 저수지, 오성제다. 이곳 역시 BTS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데 저수지를 지키는 외톨이 소나무가 지나가는 이들의 발길을 자연스레 이끈다. 이른 아침 저수지에서 피어오른 물안개가 소나무를 감쌀 때면 형언하기 힘든 신비로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저수지 옆 위봉산성도 BTS에 뮤직비디오 촬영지로 낙점받았던 곳이다. BTS 멤버들이 다 같이 나란히 서서 포즈를 취했던 위봉산성은 유사시 전주 경기전의 태조 이성계 어진과 위패 등을 피신시키려는 목적으로 조선 숙종 때 축조됐다고 한다. 실제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주성이 함락되자 태조의 어진과 위패가 화를 피해 위봉산성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집권층의 무능과 부패에 죽어가던 백성은 내버려둔 채 죽은 왕의 어진과 위패만 귀하게 모신들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떨치기가 쉽지 않다. 돌담 사이에 낀 이끼가 투쟁과 갈등을 반복했던 인간 역사의 고단함을 말해줄 뿐이다.
위봉산 깊숙한 곳에는 오랜 세월 계속해서 떨어져 내리는 물줄기를 자랑하는 폭포도 있다. 높이가 60m 정도 되는 2단 폭포, 위봉폭포다. 계절에 따라 폭포수의 양이 다르고 겨울에는 물줄기가 직선으로 얼어붙기도 한다. 계단을 이용하면 폭포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데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바위를 때리는 폭포 소리는 점점 커지고 어느새 무아지경에 이르게 된다. 조선 후기 양반 출신 판소리 명창 권삼득이 득음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위봉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은 동상호를 거쳐 다시 대아호로 향한다. 동상호와 대아호는 둘 다 인공 저수지이지만 주변 풍경이 워낙 뛰어나 인위적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저수지 주변 732번 지방도는 드라이브 코스로도 훌륭하다. 새벽 물안개, 저녁 낙조, 여름 녹음, 가을 단풍까지 차창 밖으로 매번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대아호가 다시 만경강과 만나는 지점에는 창포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창포마을은 완주 고산면 소향리의 안남·신상·운용·대향 등 4개 마을 주민들이 함께 꾸려가는 농촌 지역 공동체다. 자생하는 창포를 집단 재배하는 곳으로는 전국에서 유일하다. 마을 주민들이 ‘느림의 공간’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방문객들이 천천히 빠져들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창포를 활용한 천연샴푸 만들기부터 지역 식재료를 이용한 슬로버거 만들기, 고구마 수확, 다듬이 공연 등 마을 주민들이 직접 개발한 프로그램들이다. 마을 안에는 가족이나 단체가 이용할 수 있는 숙박·세미나 공간 등도 마련돼 있다.
/글·사진(완주)=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