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숯은 빛이요, 숲이요, 혼이다. 백가지 색깔을 머금은 검은 숯은 결을 달리해 제각각의 빛으로 반짝인다. 쌓아놓은 숯은 숲을 이뤄 설치작품이 됐고, 숯가루를 개어 만든 먹으로 일필휘지 한 드로잉에는 혼이 담겼다.
“모든 것이 다 타버린 자리에 마지막으로 남는 것이 숯입니다. 일상성을 모두 벗어버리고 순수성을 지닌 존재가 숯이죠. 불 속에서 죽은 게 아니라 붙이면 다시 불붙는 생명의 에너지를 품은 것 또한 숯입니다. 자연의 마지막 모습인 동시에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생명 순환의 근본이죠.”
그렇게 30년째 숯에 숨을 담아온 ‘숯의 화가’ 이배(64)가 부산 조현화랑의 달맞이고개 본관과 해운대 분관, 서울 평창동 갤러리2와 제주의 갤러리2 중선농원까지 4곳에서 동시에 개인전을 열고 있다. 지난해 뉴욕 페로탱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앞서 베니스비엔날레 기간 중에 이탈리아 베니스에 위치한 빌모트재단에서 전시를 기획해 주목받은 그다. 프랑스 생테티엔 현대미술관, 국립 기메동양미술관, 매그재단 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열고 프랑스 문화예술훈장 기사장까지 받은 작가가 모처럼 국내에서, 그것도 여러 도시에서 전시를 열었다.
최근 부산 조현화랑의 전시장에서 만난 이 작가는 “30여 년 전 처음 파리로 갔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나는 한국 작가로서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헤맨다”고 말했다. 1972년 홍익대 미술대학을 졸업한 그는 당시 화단의 주류였던 추상미술에 몰두하다 돌연 ‘현대미술의 심장부’였던 프랑스로 옮겨갔다. 가난한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든 파리 인근의 버려진 담배 제조공장 한 구석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던 시절이었다. 우연찮게 손에 든 바베큐용 숯 한 봉지에서 ‘길’을 발견했다.
“나는 거대한 수묵 문화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에 더없이 좋은 소재였습니다. 값비싼 물감에 비해 훨씬 저렴했으니 더 좋았죠.”
1992년에 정식으로 선보인 ‘불의 근원(Issu du feu)’은 그의 대표작이 됐다. 캔버스에 숯을 붙이고 아라비아고무액을 물에 타 적신 후 그 표면을 사포질해 광이 날 정도로 섬세하게 닦은 작품으로, 검은색인 것 같으나 그저 검지만은 않은 것이 다이아몬드의 각 면이 빛을 발하듯 신비롭다.
이번 전시에서는 ‘불의 근원’에서 한 발 더 나간 신작이 공개됐다. 작가는 “결을 맞춰 붙인 숯 위에 오일파스텔로 선을 그은, 가벼운 손놀림처럼 보이는 일종의 드로잉”이라며 “기존의 작품이 완결된 결과물이라면 신작은 작업 과정의 중간을 살짝 드러내 작가의 개입과 손맛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새로 선보인 ‘숯가루 수묵’은 사포질에서 나온 숯가루를 물과 아교에 개어 ‘먹’으로 썼다. 지난해 미국 라크마(LACMA)미술관에서 본 서예 전시에서 감흥을 받았다는 작가가 서예와 회화를 합쳐 드로잉을 이뤘다. 그가 2004년부터 선보여 온 ‘미디움(medium) 시리즈’가 “내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끄집어낸 일종의 신체 부호와도 같은 ‘획’이었고 이를 반투명 밀랍 속에 숯으로 담아 일종의 보존으로 보여준 것”이라면 신작은 “종이 위에 붓을 휘둘러 서예의 정신성과 작가적 열망을 담아 더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차별점을 갖는다. 평창동 갤러리2는 오는 23일까지, 부산 조현화랑은 31일까지 전시하고 제주 갤러리2에서는 7월11일에 막을 내린다.
/부산=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