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센트럴파크의 보행로를 주황색 천으로 감쌌고, 파리 퐁네프 다리를 베이지색 천으로 뒤덮었다. 주요 랜드마크는 물론 강물에 뜬 섬까지 ‘포장’해버리는 대지예술가 크리스토 블라디미로프 야바체프가 지난 달 31일(현지시간) 뉴욕의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84세.
크리스토 스튜디오 측은 1일 공식 SNS 계정을 통해 “크리스토가 뉴욕의 집에서 자연사했다”면서 “크리스토는 내년 9월18일부터 10월3일까지 파리 개선문을 ‘포장’하는 작업을 준비하던 중 돌아가셨다”고 발표했다.
1935년 불가리아에서 태어난 크리스토는 오스트리아 빈의 예술아카데미에서 공부했고, 1958년 평생의 동반자가 된 장 클로드를 만나 함께 작업하기 시작했다. 원래는 홍보담당자 겸 사업매니저였던 장 클로드는 크리스토와 결혼한 후 공동예술가로 활동했다. 클로드는 지난 2009년 74세로 먼저 타계했다.
이들은 1962년 독일 베를린 장벽에 대한 저항의 표현으로 204개의 휘발유통을 쌓아 거리를 막으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포장(wrapped)’ 프로젝트로는 1969년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근처의 해안지대 2.4㎞를 천으로 씌운 것을 비롯해 1985년의 파리 퐁네프 프로젝트, 1991년 일본 사토 강 계곡의 우산 설치작업, 1995년 베를린 제국의회를 은색 천으로 뒤덮은 작업 등이 대표적이다. 2005년에는 뉴욕 센트럴파크에 오렌지색 천으로 감싼 철문 7,503개를 설치해 전 세계적 관심을 끌었다.
크리스토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 예술가 백남준(1932~2006)과도 각별한 인연을 자랑한다. 1950년대 말~1960년대 초 유럽에서 활동할 당시 백남준이 자신 소유의 피아노를 크리스토에게 빌려준 일이다. 피아노를 커다란 흰 천으로 휘감은 채 돌려받은 백남준은 투덜거리며 그 천을 걷어낸 것을 두고 훗날 “두 거장의 젊은 시절 초기 협업작품이니 돈으로 따지자면 수백 만 달러가 됐을 것”이라며 농담 섞어 말하곤 했다. 백남준의 장례식에서 연사로 선 크리스토 또한 “백남준이 빌려준 피아노를 싸버린 내 작업이 있었는데, 그걸 다 풀어버린 것을 아마도 가장 후회스런 일 중 하나로 꼽을 것”이라고 말해 침통한 좌중을 웃게 했다.
크리스토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크리스토와 장클로드의 예술은 계속된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근까지 활발하게 활동했다. 지난 2016년 이탈리아 이세오 호수에 인공 부유물들을 띄우는 ‘떠 있는 부두’를 선보여 27만명의 관람객을 끌어들였다. 2018년에는 영국 런던 서펜타인 호수에 7,000개 이상의 석유드럼통을 설치해 만든 ‘런던 마스타바’를 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