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초가 뒷마당에 몰아친다. 그 폭풍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속의 사람은 태풍에 날아가지 않게, 살아남으려고 구부리고 있는 것이다. 내 작품에서의 폭풍은 독재정권 하의 시달림에 대한 마음 속 저항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작품은 그 작가가 살던 시대의 마음, 심상의 표현이다.”
‘폭풍의 화가’라 불리는 변시지(1926~2013)가 2003년에 남긴 자신의 그림 속 바람에 대한 이야기다. 변시지의 그림 속 세찬 바람은 바다를 성나게 하는가 하면 소나무를 부러질 듯 몰아세우고 초가지붕을 뒤흔든다. 그의 대표작들을 모은 전시 ‘폭풍 속으로, 변시지’가 제주돌문화공원 내 누보갤러리에서 10월10일 까지 열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을 우려해 실내활동의 제약이 큰 상황이라 100만평 대지 위에 조성된 생태공원을 가로질러 자연을 담은 작품을 감상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위안이 된다.
제주 태생으로 일본 오사카미술학교에서 유학한 변시지는 일본 서양화단 최고 권위의 미술상인 광풍회(光風會) 최고상을 23살 최연소 나이로 거머쥐었다. 그것도 조선 청년인지라 현지 언론이 발칵 뒤집히다시피 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화가는 비원 등 한국의 전통미를 탐색했고, 1970년대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는 마침내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누런빛 자연을 개척했다.
지난달까지 열린 1부 특별전에서는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에서 2007년부터 10년간 상설 전시했던 ‘난무’와 ‘이대로 가는 길’이 선보였다. 2부 전시에는 ‘태풍’과 ‘풍파’를 비롯해 ‘폭풍의 바다’ 등 대표작이 고루 걸렸다. 변시지는 생전에 “제주는 아열대 태양 빛의 신선한 농도가 극한에 이르면 흰 빛도 하얗다 못해 누릿한 황토빛으로 승화된다”고 했고 “(한국 사람은) 머리도 까맣고, 눈도 까맣고, 먹필도 까맣다. 검은색에 숙달된 민족으로서 한국의 아름다움을 창조하는데 검은색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는데 이것이 고스란히 그림에 담겼다.
전시를 기획한 누보 측은 최근 ‘공익재단 아트시지’와 함께 변시지의 70년 작품세계 전체를 집대성한 첫 화집인 ‘바람의 길, 변시지’를 출간했다. 180여 점의 그림이 작가노트와 함께 담겼다.
/글·사진(제주)=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