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글쓰기 수업에서 독자가 이런 질문을 했다. “저는 글을 정말 열심히 쓰는데, 어느 정도 쓰고 나면 자기혐오가 밀려와요. 왜 이렇게 재능이 없을까, 누가 내 글을 읽어줄까 하는 두려움, 자신에 대한 미움 때문에 글쓰기에 집중이 안됩니다.” 자기혐오는 자신의 재능, 성격, 환경, 그 모든 것에 대한 막연한 불안에서 시작된다. 이 막연한 불안의 분명한 원인은 끝없는 비교다. 타인과 나의 능력을 비교해 나 자신을 끊임없이 깎아내리는 마음의 습관에서 자기혐오는 시작된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잔소리, ‘너는 왜 누구보다 못하니’ 식의 비교를 내면화한 사람들은 그런 자기비하의 습관을 어른이 돼서도 버리지 못한다. 초자아는 부모를 비롯한 가까운 어른들의 꾸중과 체벌로 강화돼 어른이 돼서도 내면의 검열관으로 자리 잡는다. 너는 왜 그 사람보다 못하니, 너는 왜 항상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니. 우리는 이런 식으로 스스로 괴롭히는 자기혐오의 심연에 빠지고 만다.
옛사람들은 자기혐오라는 감정 자체를 몰랐다고 한다. 자기혐오는 근대화와 자본주의 사회 이후의 증상이다. 자기혐오는 너무 많은 비교 속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잃은 현대인의 고질병이 되고 있다. 나는 문학과 심리학을 공부하며 비로소 오랜 자기혐오의 짙은 그늘에서 벗어나는 중이다. 성적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안절부절 못하던 부모님의 모습에 상처를 받았던 어린 시절의 나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이제는 성적이나 각종 결과물로 가치를 판단하려는 세상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그리하여 아무리 험난한 상황에서도 나를 지켜내는 보호자이자, 나를 공격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은 채 내 입장을 분명히 밝힐 수 있는 변호사이자, 나를 막아서는 모든 장애물과 당당하게 맞서 싸우는 검투사가 돼야 한다. 이것이 자기혐오라는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나를 구하는 과정이다.
당신은 당신이 동경하는 바로 그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충분히 소중하고 아름다운 존재다. 나는 요새 매일 세 번씩 ‘나는 충분하다’는 주문을 되뇐다. 이 주문은 자꾸만 나 자신을 ‘형편없는 존재’로 깎아내리려는 내 안의 초자아가 뿜어내는 독성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준다. ‘나는 충분하다’는 주문을 세 번 되뇌며 내가 이미 지니고 있는 것들로 내 삶을 조화롭게 가꾸고 싶어하는 ‘내 안의 더 큰 나’와 만난다. 나는 충분하다. 더 많이 가지지 않아도 된다. 이미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 나는 충분하다. 나는 내 결점을 잘 알고 있지만, 그 결점 때문에 내가 지닌 본래의 빛이 가려지지는 않는다. 나는 내가 가진 지혜와 용기의 빛만으로 충분히 이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다. 나는 충분하다. 나는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내 삶을 꾸려갈 수 있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과 타인에게 의존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타인을 사랑하되 의존하지 않는다. 내 힘만으로 이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나는 충분하다’는 아주 간단한 문장을 좀 더 나다운 방식으로 해석하고 확장해 나아간다. 그렇게 나는 나를 무시하고 비난하며 깎아내리려는 초자아에 맞서고 자기혐오가 그릇된 것임을 이성적으로 깨닫는다.
내 안의 더 큰 나와 만나는 것은 이런 총체적 치유의 힘을 지니고 있다. 비난의 말들, 트라우마의 기억이 마치 ‘붉은 피’처럼 선명한 색으로 우리 가슴을 물들인다면, ‘내 안의 더 큰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내 마음이라는 작은 연못을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바다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비난의 화살, 트라우마의 상처가 아무리 붉은 피처럼 선명하더라도, 내 마음이라는 드넓은 바다에 섞여버리면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바닷물에 한 방울의 핏방울을 떨어뜨려도 아무 변화가 없는 것처럼. 내 안의 더 큰 나를 발견하고, 확장하고 성장시키면, 어떤 상처도 나를 무너뜨릴 수 없는 무적의 요새를 지을 수 있다. 나는 나를 지켜내는 최고의 보호자이자, 뛰어난 변호사이자, 용감한 검투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