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지 올해로 574주년을 맞았다. 한국 경제와 문화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우리 말과 글을 배우려는 외국인도 점점 늘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1947년 조선어학회가 편찬한 ‘조선말큰사전’ 머리말의 울림은 여전히 크다. “조선말은 조선사람에게 너무 가깝고 너무 친한 것이기 때문에 도리어 조선 사람에게서 가장 멀어지고 설어지게 되었다. 우리들이 항상 힘써서 배우고 닦고 한 것은 다만 남의 말 남의 글이요, 제 말과 글은 아주 무시하고 천대해왔다”는 지적은 2020년 현재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
다행히 선조들의 가르침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출판문화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올해도 한글날을 맞아 우리 말과 글의 가치를 다각도에서 조명한 책들이 여러 권 출간됐다.
‘한국어, 그 파란의 역사와 생명력(창비 펴냄)’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임형택 성균관대 명예교수, 정승철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최경복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등 전문가 4인의 좌담집이다. 이들은 단순히 한글의 우수성에 주목하지 않고, 파란만장한 역사를 통과한 강인한 생명력에 집중한다.
특히 개항과 서구 문화의 급격한 유입, 일제 강점, 한국 전쟁과 남북 분단 등 근현대 격랑의 세월이 우리 말과 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집중적으로 이야기한다. 이 과정에서 저자들은 한문 중심 어문생활에서 벗어나려던 언어 자주 의식의 태동, 일제의 국어말살정책에 맞섰던 국어학자들의 투쟁, 해방 후 마주한 표준어 운동과 방언 멸시, 국토 분단 이후 점점 이질화하는 남북 언어 문제 등에 대한 열띤 논의를 펼친다.
책은 다채로운 배경과 식견을 가진 학자들의 긴 좌담 끝에 강대국의 위세 속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은 소중한 문화유산인 한국어를 더욱 풍요롭고 품격 있는 소통 수단이자 민주적인 공동영역으로 가꿔나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1만6,000원.
‘나라말이 사라진 날(생각정원 펴냄)’은 방송인 출신 역사학자인 정재환 한글문화연대 공동대표가 조선어학회의 저항과 투쟁사를 기록한 책이다. 방송 진행 중 한글 사랑에 빠졌던 저자는 한글운동사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2000년 성균관대 사학과에 입학했고 석·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저자는 책을 통해 1942년 10월 이극로·이윤배·최현배 등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줄줄이 일제에 검거돼 재판에 회부됐던 ‘조선어학회 사건’을 소상하게 전한다. ‘오늘 국어를 썼다가 선생님한테 단단히 꾸지람을 들었다’는 여학생의 일기 한 줄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연결됐을 정도로 일제의 우리말글 탄압은 집요하고 극악했다. 저자는 “조선어학회 사건은 교과서에도 나오는 중요한 사건이지만 사건의 전모는 역사나 언어에 관심 있는 소수만이 알고 있는 형편”이라며 “조선어학회 사건을 되짚는 일은 또 다른 형태의 독립운동과 마주하는 경험이자 우리 말과 글이 만들어지고 성장해온 과정을 목격하는 소중한 기회”라고 강조한다. 1만5,000원.
‘한글의 감정(한글파크 펴냄)’은 조현용 경희대 한국어교육 전공 교수가 쓴 한글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다. ‘한국어 어휘교육 연구’ ‘한국어 교육의 실제’ 등 한국어 교육 관련 전문 서적을 여러 차례 펴낸 저자는 대중들에게 우리 글과 말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즐겁게 전달하고 싶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먼저 언어 교육 전공자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글 이름, 글자와 소리, 소리와 어휘에 대해 정리하고,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배경, 세종대왕과 최만리의 논쟁, 한글과 에스페란토의 닮은 점 등을 알려준다. 저자는 언어가 단순히 의사소통 도구를 넘어 위로와 치유의 기능을 한다고도 강조한다. 1만3,000원.
이 밖에 한글과 세종대왕이 등장하는 해외 작가의 역사판타지 소설도 한글판과 영문판으로 동시 출간돼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다. SF 드라마 ‘스타트렉’ 시리즈 작가로 잘 알려진 조 메노스키의 ‘킹 세종 더 그레이트’다. 저자는 5년 전 한글을 처음 접하며 세종대왕을 알게 됐고,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자료를 수집해 장편소설을 완성했다고 한다. 1만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