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중탕식으로 술 온기 유지한 '주자'와 '승반'

◆국립광주博 고려청자 특별전

청자 담긴 고려 茶·酒 문화 전해

茶 마시는 법따라 청자 잔 변화

꽃·구름·학무늬 등 정교함 더해

국보로 지정된 청자 인물형 주자. 서왕모가 신선들의 복숭아를 들고 있는 모양인데, 주전자를 기울이면 복숭아 아래로 술이 흘러내리게 된다.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국보로 지정된 청자 인물형 주자. 서왕모가 신선들의 복숭아를 들고 있는 모양인데, 주전자를 기울이면 복숭아 아래로 술이 흘러내리게 된다.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오늘날 ‘고려청자’는 범접할 수 없이 귀한 문화재지만 사실 고려 때 ‘청자’는 차(茶) 마시고 술(酒) 마실 때 사용된 일상의 일부였다. 차와 술은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에 들어왔다. 고려 왕족과 귀족들은 그에 어울리는 잔·병·주전자를 구하러 중국 월주요에서 만든 청자를 수입하다 마침내 차와 술 색이 최고로 돋보이는 ‘천하제일 비색청자(翡色靑磁)’를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오는 20일까지 열리는 ‘고려음(飮), 청자에 담긴 차와 술 문화’ 특별전은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여 더 찬란하게 피워낸 고려 사람들의 미적 감각과 관념을 보여주고자 고려청자 다구(茶具·차 도구)와 주기(酒器·술 그릇) 200여 점과 중국 자료까지 총 250여 점 유물을 그러모았다.



이번 전시가 귀한 이유는 우선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주요 고려청자가 총출동한 데다 경주·공주·대구·부여·익산·전주·진주·청주·춘천 등 전국의 국립박물관과 고려청자박물관,목포대박물관 소장품까지 빌려와 한 자리에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차와 술 문화에 대한 문헌 기록은 많으나 그 ‘모습’에 대한 자료는 부족한 편이라 고려와 동시대 중국의 그림을 근거로 고려사람들이 실제 어떻게 차와 술을 마셨는지를 복원했다는 점도 이 전시의 특별한 의미다.

통일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발굴된 14면체 주사위 주령구(왼쪽)와 '언정다영'이라고 적힌 완으로 특별전 '고려음, 청자에 담긴 차와 술 문화'가 시작된다. /광주=조상인기자통일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발굴된 14면체 주사위 주령구(왼쪽)와 '언정다영'이라고 적힌 완으로 특별전 '고려음, 청자에 담긴 차와 술 문화'가 시작된다. /광주=조상인기자


전시의 시작은 경주 안압지에서 발견된 완(입 부분이 넓은 그릇)과 경주 왕성 부근에서 발굴된 ‘주령구’다. 안압지 완의 겉면에는 ‘언정다영(言貞茶榮)’, 즉 언행이 곧아야 차를 즐길 수 있다는 글귀가 적혀있다. 14면체의 주사위인 ‘주령구’ 표면에는 ‘일거삼배(一去三盃)’ 등 술 먹기 게임의 벌칙이 새겨 있다. 차를 대하는 태도, 술을 즐기는 문화를 통해 전시의 의도를 소개한 셈이다.

차 끓이던 냄비, 차를 갈던 다연과 봉 등을 옛 그림과 함께 비교하며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청동 화로와 주전자, 석제 주자 등 청자 이전의 도구 형태들도 만날 수 있다. 최명지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차 가루를 물에 넣어 끓여 마시고, 찻솔로 휘저어 거품내 마시고, 찐잎에 물을 부어 우려내는 등 차 마시는 방법이 달라질 때마다 도구가 변화했다”면서 “차 주전자는 주구(주전자 입)가 긴 편인데 뜨거운 물을 고르게 부을 수 있는 구조가 오늘날 드립커피용 주전자와 비슷하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양한 청자 찻잔들은 차의 색을 돋보이게 하는 빛깔부터 잔에 입을 대는 촉감, 장식 문양을 통한 시각적 만족감 등을 두루 고려해 제작됐다.다양한 청자 찻잔들은 차의 색을 돋보이게 하는 빛깔부터 잔에 입을 대는 촉감, 장식 문양을 통한 시각적 만족감 등을 두루 고려해 제작됐다.


12세기에 제작된 고려청자 꽃모양 잔과 받침.12세기에 제작된 고려청자 꽃모양 잔과 받침.



고려청자의 발전사는 이처럼 사람들이 영위하던 문화상을 반영한다. 백차가 유행할 적엔 뽀얀 거품이 잘 보이는 검은 잔이 인기였다. 꽃·구름·학 무늬가 새겨진 청자 잔은 차의 맛·향에 보는 즐거움을 더해줬다. 꽃잎이 꽃봉오리를 받치듯 잔과 받침은 세트를 이뤄 예를 표했다. 술주전자의 경우, 술을 담아 따르는 ‘주자’와 주자를 담아두는 ‘승반’이 짝을 이뤘다. 승반에 뜨거운 물을 채워 중탕식으로 술의 온기를 유지했던 것이다. 입 틀어막은 원숭이 한마리가 뚜껑 위에 올라앉은 청자 연꽃무늬 주자는 “술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는 절대 외부로 발설하지 말라”는 당부처럼 보인다. 대나무를 이어붙이고, 꼬아묶고, 댓잎으로 주구를 만든 듯 사실적이고 정교한 ‘청자 대나무무늬 표주박모양 주자와 받침’도 명품이다. 국보로 지정된 ‘청자 사람모양 주자’는 여신 서왕모가 먹으면 무병장수한다는 선도(仙桃)를 두 손에 받쳐 들고 앉은 듯하다. 주자를 기울이면 복숭아 아래에서 술이 나오게 되니, 술을 따르는 것만으로도 축원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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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주자와 받침. 주전자를 받친 '승반'은 뜨거운 물을 부어 술 온도를 유지하는 역할을 겸했다.청자주자와 받침. 주전자를 받친 '승반'은 뜨거운 물을 부어 술 온도를 유지하는 역할을 겸했다.


다양한 형태의 매병들. 청자 매병을 감상용으로 보는 견해가 많았으나 기록에 따르면 꿀,참기름 등 귀한 선물용 액체를 담거나 큰 독의 술을 옮겨담는 등의 용도로 사용됐음을 유추할 수 있다.다양한 형태의 매병들. 청자 매병을 감상용으로 보는 견해가 많았으나 기록에 따르면 꿀,참기름 등 귀한 선물용 액체를 담거나 큰 독의 술을 옮겨담는 등의 용도로 사용됐음을 유추할 수 있다.


유려한 곡선미가 일품인 매병도 다채롭게 선보였다. 최 학예연구사는 “매병을 관상용(감상용)이라 생각하지만 큰 술독의 술을 술주전자에 붓기 위해 옮기는 용도로 추정되고 있다”면서 “고려시대 기록에 매병을 고급 선물용 꿀이나 참기름을 담는 데 이용했다는 기록도 전한다”고 말했다.

차와 술 문화는 고려청자의 정교한 표현법과 만나 예술로 꽃을 피웠다. 전시의 마지막은 무덤 부장품들이다. 차·술 관련 청자들을 죽어서도 품고 가고픈 고려 사람들의 염원을 되새기게 한다.

이수미 국립광주박물관장은 “박물관 진열장 속에서 소중히 전시된 청자가 고려시대의 생활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만들고 싶다는 바람에서 시작된 전시”라며 “세련미 넘치는 청자 유물들을 차와 술 문화의 두 가지 열쇳말로 바라볼 때 고려인의 삶으로 성큼 다가설 수 있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전시 전경.전시 전경.


전시 전경전시 전경


국립광주박물관은 1975년 신안해저유물 발견을 계기로 건립이 추진됐고, 아시아도자문화 교류의 거점박물관으로 정체성을 확립하는 중이다. 특별전시실 맞은 편 아시아도자문화실의 상설전시는 한반도 도자전통과 아시아 도자 교류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글·사진(광주)=조상인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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