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이 불과 3일 만에 30원 넘게 단기 급등했다. 전 세계적인 달러화 강세 흐름 속에 우리나라보다 경제 규모가 작은 대만이나 싱가포르보다도 통화가치 하락세가 가파르다. 원화 가치가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을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라는 점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장기화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원유 의존도, 경제 외형에 비해 작은 외환시장 규모 등 우리 경제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점이 노출되고 있다는 평가다.
8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1237원으로 전 거래일 대비 9원 90전 올랐다. 지난 2020년 5월 29일(1238원 50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으로 3일(1204원 40전) 이후 불과 3거래일 만에 30원 이상 상승했다.
환율이 외환 당국의 구두 개입에도 약발이 전혀 통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최근 5거래일간 환율 움직임을 보면 원화 가치는 2.06% 하락해 싱가포르달러(-0.49%)나 중국 위안화(-0.16%) 대비 낙폭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대만달러(-0.57%)와 비교해도 하락 폭이 4배에 이른다. 민경원 우리은행 연구원은 “지정학적 리스크 확대와 스태그플레이션 우려가 촉발한 증시 부진 등으로 환율 상단을 1210원에서 1250원으로 대폭 상향 조정했다”며 “특히 3월 초 원·달러 환율 급등은 위안화나 싱가포르달러 등과 비교하면 정도가 과하다”고 평가했다.
전문가들은 최근 원화 가치 급락이 우리 경제의 약점에 따른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파장이 수출과 원유 의존도가 높은 우리에게 유독 더 가혹한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당장 정유·철강·유화 등 주력 산업의 에너지 사용 비중이 높은 데다 글로벌 시장을 두고 경쟁하다 보니 유가가 올라도 이를 제품 가격에 반영하기 어렵다. 대외 의존형 경제라 글로벌 리스크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외국인 투자자도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국가 신용 위험도를 볼 수 있는 우리나라의 5년물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도 7일 35bp(1bp는 0.01%포인트)로 전일 대비 4bp 올랐다. CDS 프리미엄이 높을수록 부도 위험이 커졌다는 의미인데 아직은 낮은 수준이지만 지난해 말부터 오름세가 뚜렷하다.
하지만 산업 구조가 비슷한 대만보다도 통화가치 하락 폭이 큰 것은 경제 규모에 비해 우리나라 외환시장이 미성숙한 영향이라는 지적이다. 시장 규모가 작아 유동성에 조금만 변화가 나타나도 변동 폭이 확대되는 등 외환시장이 출렁인다는 것이다. 특히 외국인의 국내 주식 매도 자금 환전 수요가 원화 약세를 부추기는 상황이다.
원화는 위기 때마다 글로벌 리스크에 취약한 모습을 보였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원화는 최대 57%,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최대 42%까지 약세 폭이 확대됐다. 원화 약세는 이미 지난해부터 관찰됐다.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원·달러 환율 상승률은 8.2%로 달러 인덱스(6.3%)보다 높을 뿐 아니라 신흥국의 대미 환율(2.7%)을 크게 웃돌았다.
높은 중국 경제 의존도도 원화 가치 발목을 잡는 요인이다. 우리나라는 대중 교역 의존도가 24.6%로 중국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동남아 5개국(17.2%)보다도 높다. 달러 강세 국면에서 중국 경제 불안이 원화 약세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하지만 정작 위안화는 2월 중순 이후 6.3위안 안팎으로 하락하면서 2018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위안화는 지정학적 위기가 고조될 때마다 약세 압력을 받아왔는데 이번 사태에서는 안정된 모습이다. 신한금융투자는 “중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중립적 태도로 일관해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다”며 “러시아 루블화가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에서 빠지면서 위안화 위상이 제고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고 분석했다.
문제는 러시아 디폴트(채무불이행) 가능성,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기준금리 인상 등이 예상되고 있다는 점이다. 국제금융센터는 1998년과 같은 러시아 채무불이행이 현실화하면 금융시장에 큰 파장이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미 연준도 고용 등 경기 지표 개선을 바탕으로 금리를 빠르게 올릴 것으로 전망된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우리나라가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유로화나 엔화 등과 비교할 수준은 절대 아니다”라며 “혹여 러시아의 디폴트 등 악재가 발생하면 투자 심리 냉각으로 인한 충격파가 원화를 덮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