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가팔라지는 인플레이션의 직격탄을 맞은 신흥국들에서 정치 불안이 가속화하고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식량과 에너지 가격 폭등을 견디다 못해 거리로 나선 시위대의 목소리가 단순한 생활고 호소 차원을 넘어 사회 체제 변혁에 대한 요구로 격화하기 시작했다. 일각에서는 팬데믹과 전쟁이 초래한 글로벌 인플레이션이 일부 취약한 신흥국에서 또 다른 '아랍의 봄'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4일(현지 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최악의 경제난에 직면한 스리랑카에서는 정부 각료 26명 전원 퇴임이라는 초유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성난 시위대가 반정부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스리랑카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주력 산업인 관광업이 큰 타격을 받은 데 이어 이를 회복할 틈도 없이 물가가 치솟으면서 1948년 독립 이래 최악의 경제위기를 겪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정부가 에너지를 수입하지 못해 13시간 단전 조치를 시행한 것이 대규모 시위의 도화선이 됐다. 정부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내각이 사퇴했지만 국민들은 고타바야 라자팍사 대통령과 그의 형인 마힌다 라자팍사 총리의 사퇴까지 요구하며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극심한 경제난이 2005년 이래 사실상 독재를 이어온 라자팍사 가문의 퇴진 요구로 이어진 셈이다.
고물가에 따른 생활고로 촉발된 정치·사회 소요는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수단에서는 지난해 10월 군사 쿠데타 이후 군부의 지배와 식량 가격 인상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연일 경찰 및 군부와 충돌하고 있다. 이라크와 이집트 등지에서도 이슬람 성월인 라마단에 앞서 지난달 식량과 밀가루 부족에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 시위를 벌였으며 파키스탄에서도 식량 가격 급등에 따른 사회불안과 정치 혼란이 계속되는 실정이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시위의 핵심 동기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고조된 인플레이션과 식량 부족 사태다. 스리랑카의 3월 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18.7%에 이르렀으며 레바논에서는 슈퍼마켓에서 밀가루가 사라지고 빵 가격도 70%나 올랐다. 이날 발표된 터키의 3월 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월 비 61%에 달해 2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식음료와 운송비의 연간 상승률은 각각 70.3%, 99.1%로 집계됐다.
전문가들은 식량 부족과 고물가로 촉발된 반정부 시위가 신흥국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세계적인 곡물 수출국이자 에너지 부국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이 식료품 가격에 특히 민감한 신흥국들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캐피털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유가 상승 등으로 스리랑카와 파키스탄, 이집트와 가나 등지의 정치 불안이 확대되고 있다"며 “요르단과 모로코 정치 상황도 물가 상승에 영향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외신들은 지금의 상황이 2010년 전후 곡물과 에너지 가격 급등을 계기로 중동과 아랍 지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반정부 시위인 ‘아랍의 봄’ 재연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관측을 내놓았다.
상황이 시시각각 악화하자 각국 정부도 물가 상승이 민심 이반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적극 대응에 나서고 있다. 이집트에서는 지난달 21일 빵 가격을 ㎏당 11.5이집트파운드로 고정하는 통제 조치를 내놓기도 했다. 다만 밀 가격이 연일 치솟고 이집트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까지 요청한 상황에서 이 같은 조치가 얼마나 유효할지는 미지수다. 이라크의 경우 전략비축소의 밀가루·기름도 거의 고갈된 것으로 알려졌다.
보조금을 푸는 나라도 늘고 있다. 잠비아 정부는 옥수수 가격 안정을 위해 농가에 대한 비료 보조금을 확대하고 있으며 파키스탄도 2월 말 기름과 전기에 15억 달러 이상의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하지만 보조금 지원은 가뜩이나 어려운 재정을 더 악화시켜 경제난이 가중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연내 차환해야 하는 신흥국들의 부채는 2021년 5조 5000억 달러에서 올해 7조 달러로 급증했다. 영국 투자회사 애버딘의 빅터 자보 매니저는 "많은 나라에서 에너지와 식량 가격 인상이 정치와 사회 불안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아랍의 봄이 식량 가격에서 촉발됐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