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 권위이자 최대 규모의 국제 미술행사인 제59회 베니스비엔날레 미술제가 20일(현지시간) 카스텔로 자르디니와 아르세날레 전시장에서 미술계 관계자와 언론을 대상으로 베일을 벗었다. 지난 1895년 처음 개최돼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비엔날레’의 원조가 된 베니스비엔날레지만 코로나19의 타격으로 3년 만에 막을 올렸다. 오는 23일 공식 개막해 11월 27일까지 7개월의 대장정을 펼칠 예정이다. 최근 글로벌 아트신에서 한국 현대미술의 위상이 눈에 띄게 부상하는 가운데, 이번 비엔날레에서는 한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두루 살펴볼 수 있는 전시들이 열려 주목을 끈다.
◇본전시 이미래·정금형의 ‘미래’
이번 베니스비엔날레는 뉴욕 하이라인파크의 예술총괄 큐레이터인 체칠리아 알레마니(Cecilia Alemani)가 예술 총감독을 맡아, 초현실주의 여성화가 리어노라 캐링턴(1917~2011)의 책에서 따온 ‘꿈의 우유(The Milk of Dreams)’를 제목으로 택했다. 알레마니 총감독의 주제의식이 집중적으로 투영되는 본전시 참여작가 213명 중 한국작가로는 정금형(42)과 이미래(34)가 이름을 올렸다. 옛 조선소이자 무기공장이었던 아르세날레의 붉고 낡은 벽을 배경으로 놓인 이미래의 설치작품은 동물의 내장을 뽑아 휘감아 놓은 듯한 형상으로 관람객의 시선을 장악한다. 도자 초벌구이로 만든 내장같은 형태가 기계장치에 의해 조금씩 움직이고, 핏빛을 연상시키는 붉은 유약이 계속 뿜거나 흘러 전시기간 내내 조각을 물들이는 작품이다. 유혈낭자를 보는 듯하다. 젊은작가 이미래는 ‘곱고 예쁜 작품’을 선보인 적 없다. 그는 인간이나 동물의 기관을 떠올리게 형태로 기괴하게 움직이는 특유의 ‘개념적 조각’으로 일찍부터 주목받은 한국 현대미술의 ‘미래주자’다. 전시장에서 만난 이 작가는 “조각을 전공해 원래 석고,나무,금속 같은 딱딱한 재료를 다루던 중 단단한 재료와 부드러운 재료를 같이 놓고 ‘운동성’을 주면 짓이겨지는 게 흥미로워 더 부드럽고 물컹거리는 재료를 찾다보니 내장같은 형태에 이르렀다”면서 “신체에 대한 변형이 심하면 심할수록 사람들은 그것을 영혼이 담긴 인체의 일부로 여기기보다 ‘물질적, 조각적인 것으로 인식한다’는 깨달음을 얻어 작품에 반영했다”고 말했다. 이번 신작 출품작에 대해 작가는 “프레데릭 휘슬러라는 건축가가 만든 ‘끝없는 집’이라는 모델은 실현된 집은 아니지만 모든 것이 동그랗게 연결된 알 같고 자궁같은 이미지가 인상적이었고, 거기서 착안해 제목도 붙였다”면서 “구멍과 흐르는 것은 연약한 것들이지만 반대로 강력한 측면도 있어서 약함과 강함, 안과 밖이 전복된 것으로서 구현해 선보였다”고 말했다.
‘에르메스 미술상’ 수상작가인 정금형은 일상적인 사물을 본래의 용도에서 분리해 마치 생명체처럼 대하며 벌이는 독창적 퍼포먼스로 유명하다. 그는 인간의 몸을 대신하는 의수·의족부터 각종 기계들을 의인화 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줬고 그 장치와 기계들을 전시장에 펼쳐놓았다. 이들 두 작가는 생명체와 인간행위에 대한 재정의를 통해 △신체의 변형 △개인과 기술의 관계 △신체와 지구의 연결이라는 본전시의 주제를 정확히 관통했다. 비엔날레 본전시는 일정 수준 이상의 명성을 확보한 작가들이 초청되던 통념이 있었으나, 이번에는 180명이 비엔날레에 처음 참가한 새 얼굴일 정도로 전복적이며 미래지향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관 김윤철의 ‘현재’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운영하는 한국관의 작가는 전자음악과 움직이는 기계조각의 김윤철이다. 베니스비엔날레는 과거 민족주의와 제국주의가 위용을 떨칠 때 ‘국가관’ 제도를 만들었다. 각 국가관 대표작가는 현재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국가대표’인 셈이다. 김 작가는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詩) ‘재림’에서 나선이라는 주제어를 제안했고 “지금같이 혼란스러운 상황과 도래하는 우리 시대의 부풀은 경계를 상징한다”고 밝혔다. 신작 3점을 포함해 총 7점의 설치작품이 공개됐다. 우주 입자가 지구 대기권에 충돌할 때 생성되는 뮤온 입자를 실시간 검출하고 그 신호가 마치 심장박동처럼 작동해 작품을 움직이게 하는 ‘백 개의 눈을 가진 거인’, 금속광이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 대형 신작 ‘채도’는 물리 알고리즘에 의해 수학적으로 생성된 매듭이 미세하게 움직일 때마다 382개 셀의 밝기와 색이 변화한다. 눈에 띄는 점은 1995년 백남준의 영향력으로 건립된 원통형, 유리벽 구조의 한국관에 처음으로 지붕을 뜯어내고 작품을 설치했다는 사실이다. 작품 배치를 위한 과감한 시도였고, 풍부한 채광이 반짝이는 작품의 시각적 효과를 끌어올렸다. 작품은 강렬한 인상을 주는 흥미로운 볼거리, 움직이는 기계조각으로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기는 했으나 당초 의도했던 에너지의 상호작용을 구현하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개별 작품의 완성도는 높으나 시각적 흥미, 기계공학적 재미에서 더 깊은 의미를 끌어내는 데는 미흡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더불어 이번 한국관은 예술감독 선정 과정의 논란, 예술감독이 작가를 선택하는 구조적 문제로 인한 감독과 작가 간의 갈등, ‘커미셔너’임에도 이를 무마하기 급급했던 문예위의 한계를 문제점으로 노출했다.
◇새로운 맥락으로 새로 본 ‘과거’
세계 미술계가 집중하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5·18민주화운동의 가치를 미학적으로 재조명한 특별전 ‘꽃 핀 쪽으로’(to where the flowers are blooming)가 20일 스파지오 베를렌디스 전시장에서 개막했다. 전시 제목 ‘꽃 핀 쪽으로’는 작가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제6장 소제목에서 따왔다. 어두운 상처에서 밝게 꽃 핀 쪽으로 이끄는 내용처럼 역사의 아픔을 치유하고 미래 지향적 담론을 되새기자는 뜻으로 국내외 작가 11명이 참여했다. 광주비엔날레재단이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이던 2020년에 기획해 서울·광주와 타이베이,쾰른의 순회전을 거쳐 베니스에 이르렀다. 시민들의 연대를 보여주는 홍성담의 ‘오월 판화집-새벽’이 새로이 제작됐다. 광주 망월동 옛 묘역을 촬영해 색이 바래가는 영정사진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연결하고 그 과정에서 잊히는 것과 기억되는 것들을 질문하는 노순택의 ‘망각기계’를 비롯해 배영환, 진마이어슨, 최선 등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1970~80년대부터 활동해온 원로거장들을 현대미술의 새로운 관점에서 본 특별전도 주목할 만하다. 벨기에 보고시안재단 주최로 콘타리니 폴리냑에서 21일 개막하는 전광영의 전시는 베니스비엔날레 재단이 여러 경쟁자들 중에 엄선한 공식 병행전시 중 하나다. 박서보가 포함된 퀘리니 스탐팔리아 재단의 특별전, 팔라제토 티토에서 열리는 하종현의 회고전, 팔라초 카보토의 이건용 신작전, 빌모트재단의 배병우 사진전 등이 현지 분위기를 달구고 있다. 베니스비엔날레는 ‘핫’한 동시대미술을 다루는 동시에 의미있는 회고전을 통해 과거의 작업에 맥락과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 2015년 병행전시로 열린 ‘단색화’ 전시로, 1970년대 한국의 단색조 미술이 서구 미술계에 새롭게 소개돼 해외 주요 미술관들이 작품을 소장하는 계기가 됐고 이후 작가들의 재조명과 작품값 상승까지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