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축구대표팀이 시민들의 마음에 희망과 큰 위로를 선물했다. 고된 일상과 그에 더해지는 크고 작은 이슈들로 지쳐 있던 사회에 연말의 설렘과 활력을 되찾아준 것이다. 승패를 떠나 선수들에게 “잘 싸웠다”고 격려하는 성숙한 응원 문화도 감동스럽고 세계인이 국적을 초월해 붉은악마와 함께 우리 선수들의 투혼을 응원하는 모습을 보니 김구 선생님이 말씀하신 문화로 나라를 지킨다는 ‘문화보국’의 뜻을 실감하게 된다. 값비싼 비용을 치르더라도 앞다퉈 개최국이 되기 위한 경쟁에 나선다. 2002년 월드컵을 생각해보자.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이 스포츠 선수들을 보면서 꿈을 키웠던가. 월드컵 키즈는 이제 어엿한 선수로 성장하여 활동 중이니 말이다.
비슷한 시기에 문화계에서는 월드컵에 준하는 규모의 이벤트가 열렸었다. 바로 2004년 국제박물관협회(ICOM) 서울대회다. 세계 박물관의 올림픽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대회는 당시 아시아 최초로 서울에서 개최됐다. 총 100여 개국 1300여 명의 박물관·미술관 종사자가 참석한 성공적인 대회였다. 자연히 대회의 임팩트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까지 퍼졌다. 대회 주제는 ‘박물관과 무형 문화유산(Museums and Intangible Heritage)이었다. 이는 세계 박물관 역사에 변화를 일으킨 순간으로 남았다. 박물관이 더 이상 유형 문화유산만을 다루지 않고 ‘인간 문화재’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더 친숙한 무형의 문화재까지 범위를 확대했기 때문이다.
박물관에 대한 정의는 1946년 ICOM 설립 이후 여러 차례 개정됐다. 그중 2007년 개정을 보면 박물관의 정의에 무형 문화유산도 포함됐으며 이것은 2004년 서울대회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로부터 15년 만인 올해 ICOM은 박물관을 재정의했다. 새 정의에 따르면 “박물관은 유무형 유산을 연구·수집·보존·해석·전시해 사회에 봉사하는 비영리 연구 기관이다.” ICOM은 이번 개정을 통해 개방성·포용력·다양성과 지속 가능성을 명시하고 무엇보다 박물관의 윤리적·전문적인 운영과 소통을 강조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문화 강국임에 틀림없다. ICOM 서울대회가 남긴 성과만 보더라도 그렇다. 그러나 정작 우리 문화의 보고인 한국의 박물관·미술관은 어느 수준에 와 있는가 생각해보면 갈 길이 요원하기만 하다. 박물관 한 곳이 세계적인 수준의 전시를 펼친다고 해서 박물관 문화가 질적으로 향상했다고 판단하면 안 된다. 한국 박물관 생태계에는 공립과 사립 기관 모두가 하나의 커뮤니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박물관과 미술관이 나아갈 방향에는 사회와 시민의 요구와 동시대 감각에 맞게 개편돼야 할 것이 산적해 있다.
당장 우리가 사용하는 ‘박물관(博物館)’이라는 용어는 유형의 물체를 강조하는 유물 중심적인 박물관을 의미하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유입된 정책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러니 ‘박물관’이라는 용어에 미래 지향적인 뮤지엄의 비전을 모두 담기에는 어려움이 따를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표적인 뮤지엄인 ‘박물관과 미술관’이 세계 어느 국가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분리돼 있다. 해외의 뮤지엄이라는 개념은 박물관·미술관·과학관·동물원과 식물원 등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인 반면 국내에는 모두 분리돼 명명된다. 또 한국의 뮤지엄은 엄격한 심사를 거쳐 지방자치단체에 등록하게 돼 있지만, 등록 뮤지엄 외에도 누구나 ‘미술관’ ‘박물관’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상업적인 전시 기관이나 전혀 문화와 무관한 영업장도 ‘미술관’ 또는 ‘박물관’이라는 상호로 운영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리 문화 정책은 지금껏 건립 중심에 초점을 맞춰서 단시간에 전국에 1000개의 뮤지엄을 달성했다. 그러나 그만큼 성숙하지 못한 제도 안에서 전문성과 지속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지는 부작용을 낳았다.
ICOM 서울대회 이후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이제는 제대로 된 열매를 봐야 할 때다. 법제적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미국뮤지엄연합회(AAM)는 2018년 뮤지엄의 총관객 수가 미국의 스포츠 관객보다 많다고 집계했다. 또한 시민 대다수가 지역사회에 기여하고 학교와 협력하며 대중에 봉사하는 뮤지엄을 긍정적인 공간으로 여긴다고 밝혔다. 이렇듯 뮤지엄은 우리 사회 속 드물게 존재하는 신뢰의 공간이자 문화의 공간이다. 한 가지 희망적인 것은 MZ세대로 갈수록 뮤지엄 방문이 일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이제는 제도가 뒷받침돼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