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법' 14년 표류 끝 첫 발 뗐지만 첩첩산중

의협·병협·치협, 17일 공동 성명 "결사 반대" 입장 고수

무상의료본부·환자단체도 "보험사 배불리려는 꼼수" 비판

고대안암병원에 설치된 실손보험 청구 키오스크의 모습. 사진 제공=레몬헬스케어고대안암병원에 설치된 실손보험 청구 키오스크의 모습. 사진 제공=레몬헬스케어




14년간 공회전하던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법'이 어렵사리 국회 첫 문턱을 넘었다. 국회 정무위원회가 16일 법안소위를 열고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골자로 하는 보험업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면서 2009년 처음 정무위에 등장한 지 14년만에 진척을 나타낸 것이다. 하지만 의사, 병원단체를 필두로 환자단체까지 나서 반발하고 있어 갈 길이 멀다.



◇ 의사·치과의사 단체 “민간보험사 이익 우선하는 법안 통과 반대”


대한의사협회와 대한병원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는 17일 공동성명서를 내고 "국민 편의보다 민간보험사 이익을 우선하는 보험업법 일부개정법률안이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통과된 데 대해 여전히 반대한다"고 밝혔다.

이들 단체는 다양한 소통창구를 통해 정부와 국회에 실손보험 청구간소화 법안의 문제점을 알리며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해왔음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정부와 의료계, 보험협회로 구성된 '디지털플랫폼정부위원회'에서 상당 부분 합의점이 도출되던 가운데 국민의 피해가 예상되는 불완전한 법안의 입법이 진행되어선 안된다는 게 이들 단체의 주장이다.

이들은 의료기관에서 환자의 보험금 청구 자료를 의무적으로 제출해야 한다는 강제조항이 바뀌지 않은 점을 가장 큰 문제라고 봤다. 실손보험의 실제 계약 당사자가 아닌 의료기관에서 협조 차원이 아니라 의무사항으로 강제하는 조항 자체가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환자의 의료정보가 넘어가면 결국 보험사의 지급 거절 명분으로 악용될 수 있다”며 “환자 개인정보 보안도 담보할 수 없다”고 날을 세웠다. 중계기관이란 용어를 '전송대행기관'으로 수정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보험개발원이 전송대행을 담당하더라도 여전히 부작용 소지가 많다고도 꼬집었다.

이들은 "아무리 기업의 이익과 실리추구가 중요하다고 해도 국민에게 위해가 되거나 공익에 반하는 것이라면 정도를 지켜야 하는데 보험사들이 그 선을 넘었다"며 "아직 상임위 전체회의, 법제사법위원회 등의 절차가 남아있는 만큼 국민의 진료정보 보호와 자기결정권을 보장하고 국민 편의를 실질적으로 충족할 수 있는 합리적인 법안을 만들수 있도록 협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 실손보험 청구 번거로워 시민 불편 가중…입법 시도 14년째 불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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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는 보험 가입자가 보험금을 받기 위해 관련 자료를 의료기관에 요청하면 중계기관의 전산망을 통해 보험업계로 바로 전송하도록 보험업법을 개정하는 것이다. 실손보험은 2020년 기준 전 국민의 80%(4138만 명)가 가입해 ‘제2의 건강보험’으로도 불리지만 보험금 청구 절차가 까다로워 소비자들의 불만이 컸다. 현행 제도는 실손보험 가입자가 보험금을 지급받으려면 병원을 직접 방문해 진료 영수증, 진단서, 진료 세부내역서 등의 문서를 발급받아 보험사에 제출해야 하는 구조다. 이러한 번거로움 때문에 보험금 청구를 포기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소비자단체가 지난 2021년 실손보험 가입자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 47.2%가 '지난 2년간 청구를 포기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병원을 방문할 시간이 부족했다’, ‘증빙서류를 보내는 게 귀찮았기 때문’ 등이 이유로 꼽혔다.



이에 국민권익위원회가 2009년 보험사별로 달랐던 보험금 청구 양식을 통일하고, 방법도 더 간단하게 바꿔야 한다고 권고한 이후 관련 법안이 수차례 국회에 발의됐지만 번번이 의료계의 반대에 부딪혀 진척되지 못했다. 대한의사협회를 필두로 대한약사회·대한병원협회·대한치과의사협회 등 의료직역 단체들은 "민감한 개인 진료기록을 민간 보험사에 넘기면 결국 국민들에게 불이익을 초래할 것"이라며 격렬히 반대하고 있다.

당정이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에 드라이브를 걸면서 올 3월부터 정부, 보험업계, 의료계, 소비자단체 등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관련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하는 ‘8자 협의체’가 가동되고 있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도 의료계와 보험업계 간 이견차가 좁혀지지 않은 탓이다. 의료계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을 중계기관으로 설정하는 데 대해 반대하자 최근 보험업계가 보험개발원을 대안으로 제시했는데 여전히 양 측 입장은 평행선을 달렸다.

◇ 환자단체·무상의료본부 “환자 불이익 커질 것…의료민영화 우려도”


비단 의료서비스 공급자들만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이용자 측인 일부 시민단체와 환자단체들도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무상의료운동본부는 15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 앞에서 ‘돈벌이 위한 민간보험사 개인의료정보 전자전송 국회 논의 중단 촉구’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사진 제공=무상의료운동본부무상의료운동본부는 15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 앞에서 ‘돈벌이 위한 민간보험사 개인의료정보 전자전송 국회 논의 중단 촉구’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사진 제공=무상의료운동본부


의료민영화 저지와 무상의료 실현을 위한 운동본부는 이날 성명서를 통해 "청구 간소화는 민간보험사가 환자의 내밀한 진료 정보를 축적할 수 없는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보험사들은 한사코 거부했다"며 "민간보험사의 이윤을 위하 건강보험을 공격하고 환자를 궁지로 몰아넣는 정부와 국회를 강력히 규탄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환자 정보가 보험사의 상품 설계, 보험금 지급 기준 마련 등에 활용된다면 보험금액 차별 등의 결과를 낳을 수 있으며, 특히 고령층 환자가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의료민영화의 단초를 제공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무상의료운동본부는 "실손보험의 존재는 국민건강보험을 위태롭게 한다"며 국회를 향해 해당 법안을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해당 성명서에는 한국암환자권익협의회, 한국루게릭연맹회, 한국폐섬유화 환우회, 한국다발성골수종환우회 등 복수의 환자단체도 이름을 올렸다.

/안경진 기자 realglasses@sedaily.com


안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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