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연(70·여) 씨는 한달 전부터 눈의 흰자위가 노래진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귤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나아지기는 커녕 몸의 다른 부위까지 노랗게 변하기 시작했다. 찜찜하던 찰나 오랜만에 만난 지인으로부터 '얼굴빛이 너무 안좋으니 빨리 병원에 가보라'는 말을 들은 김씨. 여러 검사를 받은 결과 '췌장암 때문에 황달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설마 했던 그녀는 이미 암이 너무 진행돼 수술조차 어렵다는 말에 망연자실했다.
◇ 귤 많이 먹어 얼굴 노래졌다? 눈 흰자위 색 확인 부터
귤을 많이 먹었더니 얼굴이나 손이 노래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낭설은 아니다. 귤·단호박·당근··고구마 등 베타카로틴이 많은 채소나 과일을 과다하게 섭취하면 혈중 베타카로틴이 증가하면서 피부에 노란색 색소침착이 나타난다. 이를 카로틴혈증이라고 하는데, 일시적인 현상이므로 건강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얼굴색이 노랗게 변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황달과 카로틴혈증을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둘을 구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눈의 흰자위(공막) 색깔을 확인하는 것이다. 베타카로틴은 눈의 흰자까지 침투할 수 없다. 피부색 뿐 아니라 눈의 흰자까지 변했다면 황달을 의심해 봐야 한다.
황달은 간기능에 이상이 생겼거나 췌장암, 담관암과 같은 질병의 신호일 수 있다. 눈의 흰자위부터 시작해 점차 몸의 아래쪽으로 퍼지는 게 일반적인데, 몸의 변화가 서서히 나타나다 보니 의외로 본인이나 가족들도 바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얼굴이 노랗게 변하는 증상과 함께 몸의 다른 변화도 유심히 관찰해야 한다. 황달과 함께 나타나는 대표적 증상은 소변의 색이 진해지는 것이다. 막혀있는 담즙의 성분이 소변으로 배설되면서 이 같은 증상이 나타난다. 황달이 암에서 유발된 경우 체중이 줄거나 소화가 잘 안 되고 입맛이 떨어질 수도 있다.
◇ 황달은 빌리루빈 쌓여 생기는 현상…췌장암·담관암 신호일 수도
지방의 소화작용을 돕는 담즙은 간에서 만들어져 담낭(쓸개)에 저장됐다가 식사를 하게 되면 담관을 통해 소장으로 이동해 소화를 돕는다. 황달은 담즙이 정상적으로 배출되지 못하면서 담즙 내에 있는 빌리루빈 색소가 몸에 과다하게 쌓일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황달의 원인은 다양하다. 용혈성 빈혈과 같이 빌리루빈이 지나치게 많이 생성되는 경우와 간손상으로 인해 정상적으로 빌리루빈을 처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췌장암·담관암과 같은 종양이 생겼을 때도 담관을 막으면서 담즙이 흐르지 못해 황달이 생길 수 있다. 이경주 한림대동탄성심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암에 의해 황달이 생긴 경우 황달 증상이 호전될 때까지 적극적으로 암치료를 못 하는 경우가 많다"며 "신속히 황달 증상부터 치료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황달이 있는 상태에서 수술이나 항암치료를 받으면 이미 몸의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라 합병증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치료과정에서 응고장애·담관염·간부전을 유발하고 심한 경우 패혈증까지 올 수 있다.
◇ 황달 호전되려면 2~4주 소요되는데…항암치료까지 제약 받을 수도
황달의 원인이 암으로 인한 담관폐색으로 밝혀지면 내시경적역행성담췌관조영술(ERCP)을 시행한다. ERCP는 내시경을 십이지장까지 삽입한 다음, 십이지장 유두부라는 작은 구멍을 통해 담관과 췌관에 조영제를 주입하고 병변을 관찰하는 시술이다.
진단과 동시에 막혀있는 담관을 뚫고 스텐트를 삽입해 담즙이 정상적으로 내려올 수 있도록 돕는다. 다만 ERCP를 받더라도 황달 증상이 즉각 해소되는 건 아니다. 고여 있는 담즙이 빠져나오고 황달이 호전될 때까지는 2~4주까지 걸릴 수 있다. 황달 치료가 늦어져 암의 결정적인 치료시기를 놓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특이 증상 없는 췌장암·담관암…황달 신호 알아차리면 조기진단
황달로 병원을 방문했다가 암 진단을 받는다면 누구나 좌절하기 쉽다. 그러나 어쩌면 황달 덕분에 암을 조기에 진단할 수 있었다고 여겨야 할지도 모른다. 췌장암, 담관암은 ‘침묵의 암’으로 불릴 정도로 초기 증상이 거의 없다. 특히 췌장암은 췌장 자체가 몸속 깊숙이 위치해 있기 때문에 암을 발견했을 때 수술이 가능한 환자의 비율이 20%에 불과하다.
췌장암으로 황달이 발생하는 것은 종양이 담관과 가까운 췌장의 머리 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암이 담관과 먼 췌장의 몸통이나 꼬리 쪽에 위치해 있다면 증상이 늦게 나타나므로 그만큼 발견이 어렵다.
이 교수는 “암으로 황달 증상이 생겼는 데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 결정적인 암 치료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며 “황달이 암을 조기에 발견해 치료할 수 있는 신호일 수 있으므로 의심 증상이 나타났다면 즉시 병원을 방문해 전문의에게 검사를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