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 금융 경제·금융일반

英 싱크탱크 "韓 상속세율은 도둑질…'기업 죽이기' 가까워"

[2024 신년기획-결단의 해, 막 오른 경제전쟁]

<4>'상속세 원조' 英도 폐지 수순

英국민 '최악의 세금'으로 상속세 꼽아

英싱크탱크 "상속세는 삼중·사중 과세"

자산가치 상승에 대상·금액 느는데

韓세율·과세표준은 24년째 제자리

영국 런던에 위치한 애덤스미스연구소(ASI). 1977년 설립된 ASI는 영국을 대표하는 경제 싱크탱크 중 하나다. 런던=이준형 기자영국 런던에 위치한 애덤스미스연구소(ASI). 1977년 설립된 ASI는 영국을 대표하는 경제 싱크탱크 중 하나다. 런던=이준형 기자




“상속세는 이중과세를 넘어선 삼중·사중 과세입니다.”

에이먼 버틀러 애덤스미스연구소(ASI) 공동창립자(소장)는 지난해 12월 영국 런던에서 진행된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지적했다. 소득이 발생하면 과세가 이뤄지고 주택을 받으면 취득세를 내는 등 각종 세금이 붙는데 또 상속세를 매기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버틀러 소장은 “런던 집값만 해도 수백만 파운드로 상속세 과세 기준(32만 5000파운드·약 5억 5000만 원)을 훌쩍 넘는다”며 “상속세로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것은 중산층”이라고 설명했다.

영국에서는 상속세 과세 대상이 늘면서 관련 세입도 매년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시장조사 기관인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영국의 상속세 수입은 2012년 31억 1000만 파운드에서 2022년 70억 9000만 파운드로 최근 10년 새 2배 이상 늘었다. 상속세 과세표준에 인플레이션을 반영하지 못하면서 같은 기간 과세 인원이 3배 가까이 뛴 한국보다는 못해도 영국도 심각한 상황이다. 영국 예산책임청(OBR) 관계자는 “2010년 이후 상속세 수입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며 “이는 주로 자산 가격 상승에 기인한다”고 밝혔다.

올 하반기 총선을 앞둔 영국 정부가 상속세 폐지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것은 경제 활력을 제고하기 위해서다. 영국은 올해 경제성장률이 0.6%(IMF 기준)에 그쳐 2년 연속 0%대 성장이 예상된다. 구체적인 감세안은 영국 정부가 3월에 발표할 예산안에 담긴다. 버틀러 소장은 “(상속세 폐지는) 정치적 결단”이라며 “(폐지가 되면) 3년 후부터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총선 앞둔 英…‘상속세 폐지’ 검토


영국은 상속세 원조국이다. 18세기 후반 근대적 의미의 상속세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도입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 직후 부의 양극화를 줄이려는 조치였다. 이후 영국의 상속세 제도는 200년 넘게 유지됐다. 현재 영국의 상속세 최고세율은 40%로 미국(40%)과 같고 한국(50%), 일본(55%)보다 낮다.

이런 영국이 상속세 제도의 존속 자체를 고민하고 있다. 리시 수낵 총리가 이끄는 영국 보수당 정부는 3월 발표할 예산안에 상속세의 단계적 폐지 등 감세안을 넣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올 하반기로 예상되는 영국 총선을 앞두고 야당인 노동당에 지지율이 밀리자 표심 관리에 나선 것이다. 이는 곧 상속세 폐지에 대한 긍정 여론이 부정 여론보다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최근 경기 침체도 한몫했다. 영국은 2020년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Brexit) 이후 주요 7개국(G7) 중 가장 낮은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지난해(0.5%·국제통화기금 기준)에 이어 올해(0.6%)도 0%대 성장률이 예고됐을 정도다. 영국 노동당의 레이철 리브스 의원은 이를 두고 “세계 무대에서 영국이 얼마나 뒤져 있는지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집권당인 보수당 지지율이 노동당에 15~20%포인트 뒤지는 것도 ‘저성장 늪’과 무관하지 않다. 김흥종 고려대 국제대학 특임교수는 “영국 경제는 향후 몇 년간 브렉시트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며 “당분간 저성장 기조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상속세 폐지’ 카드가 이런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까. 적어도 상속세는 영국에서 ‘국민이 가장 싫어하는 세금’으로 꼽힌다. 영국 여론조사 기관 유고브가 지난해 하반기 영국인 2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1%는 상속세가 ‘부당하다’고 답했다. 소득세가 부당하다고 응답한 비율(33%)보다 2배 가까이 높았다. 또 다른 주요 세금인 부가가치세에 대한 부정적 응답 비율(34%)도 상속세(61%)의 절반가량에 불과했다.

맥스웰 말로(왼쪽) 영국 애덤스미스연구소(ASI) 연구디렉터와 에이먼 버틀러 ASI 소장. 런던=이준형 기자맥스웰 말로(왼쪽) 영국 애덤스미스연구소(ASI) 연구디렉터와 에이먼 버틀러 ASI 소장. 런던=이준형 기자


상속세가 부당하다고 보는 주된 이유는 ‘이중과세’다. 구체적으로 상속세를 부당하다고 여긴 응답자 10명 중 4명(42%·복수 응답)은 그 이유로 ‘소득이 발생할 때 이미 과세함’을 꼽았다. ‘정부가 상속재산에 과세할 권리가 없다’고 응답한 비율도 17%에 달했다. 이어 ‘가족에게 재산을 남기기 위한 노력을 처벌하는 것(11%)’ ‘과세 기준이 물가 상승세를 따라오지 못함(10%)’ ‘세율이 지나치게 높음(9%)’ 순이었다. 2023년 12월 영국 런던에서 만난 데이비드 스터록 영국재정연구소(IFS) 선임 이코노미스트는 “영국에서 상속세 부담을 낮춰야 한다는 주장은 1980년대부터 제기됐다”며 “상속세가 이중과세라는 의견은 합리적인 지적”이라고 말했다.

상속세에 대한 부정 여론은 갈수록 커질 가능성이 높다. 가파른 자산가치 상승세로 상속세를 내야 하는 영국인도 덩달아 늘고 있어서다. 영국 재무부(HM Treasury)에 따르면 과세 연도 기준 2020~2021년 영국 사망자의 3.73%가 상속세를 냈다. IFS는 2032~2033년에 이 비율이 7%를 넘어설 것으로 보고 있다. 스터록 이코노미스트는 “2032~2033년에는 영국인 8명 중 1명(12%)이 자신의 사망이나 배우자·동거인의 사망으로 상속세 과세 대상에 오를 것”이라고 분석했다.

영국 애덤스미스연구소(ASI)는 상속세를 폐지해도 재정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고 강조했다. 실제 과세 연도 기준 2022~2023년 영국의 상속세 수입은 70억 9000만 파운드(약 11조 9000억 원)로 전체 세입(1조 170억 파운드·약 1706조 원)의 약 0.7%에 그쳤다. 에이먼 버틀러 ASI 소장은 “(상속세) 세율을 0%로 낮춰도 재정 타격은 사실상 없는 수준일 것”이라며 “상속세로 인한 사회적 비용 등을 고려하면 (상속세 폐지의) 실보다 득이 더 크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한국의 상속세도 언급했다. 한국의 상속세 최고세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인 50%로 최대주주 할증 과세 적용 시 60%까지 치솟는다. 맥스웰 말로 ASI 연구디렉터는 “(상속세율) 60%는 사실상 도둑질”이라며 “‘기업 죽이기’에 가까운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버틀러 소장은 한국 정부가 상속세로 주식을 물납받아 국내 최대 게임 업체 넥슨의 2대 주주로 올라선 것을 두고 “끔찍하다(horrible)”고 말했다. 버틀러 소장은 “(넥슨 같은 사례는) 회사의 핵심 가치를 해칠 수 있다”며 “정부가 가진 지분을 매각하려고 해도 제값을 받지 못할 가능성도 높다”고 했다. 실제 정부는 지난해 말 넥슨 지주사 NXC의 지분 29.3%를 팔려고 내놓았지만 두 차례 연속 유찰됐다.

우리 정부가 상속세 개편의 필요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상속세 세율과 과세표준은 2000년 이후 24년째 그대로다. 자산가치가 빠르게 오르며 상속세 과세 인원은 2018년 8002명에서 2022년 1만 5760명으로 최근 5년새 2배 가까이 늘었다. 정부는 지난해 태스크포스(TF)를 꾸리는 등 상속세 개편 작업에 시동을 걸었지만 올 4월 총선을 앞두고 ‘부자 감세’ 논란에 부딪혀 흐지부지된 상황이다.

‘미술품 물납제’ 덕 본 英 '테이트모던'


2023년 12월 영국 런던의 테이트모던. 오래된 발전소를 개조해 2000년 문을 연 영국의 대표적 현대미술관인 이곳에서는 정부가 세금으로 물납받은 작품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실제 상속세 등 세금을 미술품으로 대신 내는 ‘미술품 물납제’ 덕분에 테이트모던 설립이 가능했다고 보는 전문가도 적지 않다.

미국의 사진작가 도로시아 랭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테이트모던은 랭의 대표작 ‘이주민 어머니’를 소장하고 있다. 미 캘리포니아 이주 농민을 촬영한 사진으로 20세기 미국 대공황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꼽힌다. 테이트모던에 전시된 사진은 1950년 인쇄됐다. 사진 왼편에는 ‘영국 정부가 바버라 로이드의 상속세로 물납받았다’는 문구가 쓰여 있다.

상속세 원조국인 영국은 1896년 미술품 물납 제도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도입했다. 미술품 물납제가 활성화한 프랑스의 도입 시점(1968년)보다 70년 가까이 빠르다. 영국예술위원회 등의 심의를 거쳐 가치를 인정받은 작품은 현금 대신 세금으로 납부할 수 있다.

영국 런던에 위치한 테이트모던. 2000년 개관해 영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관으로 자리 잡았다. 런던=이준형 기자영국 런던에 위치한 테이트모던. 2000년 개관해 영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관으로 자리 잡았다. 런던=이준형 기자


미술품 물납제의 목표는 ‘국민의 문화 향유권’이다. 세금을 내기 위해 상속받은 문화재 등을 시장에 파는 대신 정부에 물납해 국가의 문화적 부(富)를 축적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다. 프랑스만 해도 1973년 파블로 피카소의 사망 후 유작 200여 점을 상속세로 물납받았다. 프랑스 파리의 ‘피카소미술관’이 1985년 개관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이런 맥락이 있다. 피카소미술관은 전 세계 미술관에서 가장 많은 피카소 대표작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미술품 물납제가 지난해 초 시행됐다. 이 때문에 2020년 별세한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 회장이 남긴 ‘이건희 컬렉션’은 삼성가(家)의 상속세 납부로 이어지지 못했다. 모네·샤갈·피카소 등의 작품이 포진한 이건희 컬렉션의 가치는 약 3조 원으로 평가받는다. 삼성 오너 일가가 내야 할 상속세(약 12조 원)의 30%가 넘는 가치를 지녔던 것이다.

국내 미술품 물납제는 아직 걸음마 단계로 활성화돼 있지 않다. 물납제 시행 첫해인 지난해에도 미술품으로 상속세를 납부한 사례가 사실상 전무했다. 선진국처럼 관련 제도를 활성화하려면 감정평가 시스템 구축과 함께 제도 정착을 위해 인센티브를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국내의 한 세법 전문가는 “영국의 경우 미술품으로 세금을 대신 납부할 경우 상속세의 25%를 감면해준다”며 “선진국처럼 다양한 활성화 방안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세금 폭탄' 지적에…英, 제조업 살리기 나선다


각종 세금 부담이 큰 영국은 ‘저성장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제조업 살리기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코로나19,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Brexit) 등 외부 여건이 녹록하지 않은 가운데 ‘세금 폭탄’ 지적이 내부에서 제기되자 정책적 결단을 내린 것이다.

12일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글로벌에 따르면 영국의 제조업 생산은 2023년 12월 기준 10개월 연속 줄었다. 제조업 일자리도 15개월째 감소세다.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 역시 지난해 11월 47.2에서 12월 46.2로 1포인트 하락했다. PMI가 50을 밑돌면 업황이 악화됐다는 의미다.

제조업 경기 악화는 금융·서비스업에 강했던 영국의 저성장 기조에 직격탄이 됐다. 영국의 65세 이상 고령층의 고용률(11.5%)은 유럽연합(EU) 평균치(6.1%)를 2배 가까이 웃돌 정도로 노동인구 고령화 또한 심화됐다.

이에 영국은 최근 첨단산업을 중심으로 제조업 지원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11월 발표한 ‘영국 배터리 전략’은 영국의 제조업 육성 의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국 배터리 산업에 20억 파운드(약 3조 4000억 원)를 투입해 연구개발(R&D) 등을 지원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4000만 파운드(약 670억 원)를 투자해 ‘영국배터리산업화센터(UKBIC)’ 등 R&D 기지를 구축하겠다는 구상도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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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의지로 영국은 지난해 타타그룹의 유럽 최대 배터리 생산기지를 유치하기도 했다. 영국 정부가 타타그룹에 지원할 것으로 알려진 보조금은 5억 파운드다.


런던=이준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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