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따른 배터리 생산 보조금인 첨단제조생산세액공제(AMPC)액을 나눕시다.” 배터리 생산을 위해 미국에 70조 원 넘게 투자해 신·증설을 추진해온 국내 배터리 3사가 미국 합작사들로부터 AMPC를 나눠 갖자는 요구를 받고 절반가량 나눠줘야 할 처지에 놓였다.
배터리사의 한 고위 관계자는 24일 “미국에 배터리 공장을 짓고 있는 삼성SDI는 현지 합작사로부터 50% AMPC 배분을 요구받아 지분율(삼성 51%·현지 49%)대로 나누기로 했다”며 “이미 공장을 가동 중인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은 최고 80%까지 배분 요구를 받은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당초 배터리 3사는 영업이익에 반영하는 AMPC 수입이 단독으로 받을 경우 내년에는 10조 원에 달할 것으로 기대했다. 세계 전기차 시장이 얼어붙은 상황에서 엄청난 인센티브 요인이 아닐 수 없다. 현재 LG에너지솔루션은 테네시주와 미시간주에 GM과의 합작2·3공장 등 총 8개, 삼성SDI는 인디애나주에 스텔란티스와의 합작공장 2개 , SK온은 켄터키주와 테네시주에서 포드와의 합작공장 건설을 각각 추진하고 있다. 김연규 한양대 국제학부 교수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올해 11월 미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 조 바이든 정부가 발효시킨 IRA를 폐지하겠다고 공언해 배터리 3사는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설상가상으로 국내 배터리·전기차사는 내년부터 미 재무부·에너지부·국세청이 지정한 중국·러시아·북한·이란의 해외우려단체(FEOC)에서 나오는 핵심 광물을 사용하면 미국에서 보조금을 받을 수 없게 됐다. FEOC가 제조·조립한 배터리 부품을 쓰면 올해부터 보조금을 받지 못한다. 한중 합작기업의 경우 반도체처럼 중국이 25%의 지분을 확보하면 보조금 혜택이 없다. 지난해 말 미국 정부가 IRA의 세부 규정을 바꾼 결과다.
미중 패권 경쟁 심화로 반도체·배터리·모빌리티·에너지 분야에 필수적인 희토류와 리튬 등 핵심 광물 확보 경쟁이 가열되고 있다. 미국은 자원 탐사 확대에 나서면서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과의 자원 연대 전략을 펴고 있고 중국은 엄청난 내수 시장을 바탕으로 자체 공급망 구축과 핵심 자원 수출통제에 나섰다. 중국은 리튬·희토류·니켈·코발트·구리 등 핵심 광물 가공 분야를 장악해 세계 공급망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칠레·볼리비아·아르헨티나·멕시코 등이 리튬 국유화 조치를 단행하고 인도네시아는 원광 수출을 금지하면서 해외 기업에 자원을 얻으려면 자국에 정·제련 시설을 구축할 것을 요구한다. 일론 머스크가 ‘돈 찍어내는 면허증’이라고 묘사한 리튬의 경우 전기차 수요 감소로 2년 전보다 가격이 7분의 1 수준으로 폭락했으나 각국은 광산 지분 확보 전쟁에 나섰다. 자원 무기화 대상도 리튬·희토류에 이어 니켈·코발트·흑연·갈륨·게르마늄·보크사이트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특히 최근 대만 총통 선거에서 친미(親美)·반중(反中) 성향인 민주진보당의 라이칭더 후보가 당선된 뒤 중국의 군사·경제 압박 증가로 공급망 분리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중국은 미국의 반도체·배터리 제재에 대응해 지난달부터 ‘산업용 금’이라 불리는 희토류 가공 기술 수출 금지 등 희토류·흑연 수출규제에 들어갔다. 리튬의 경우 중국은 자국 생산량이 세계 16% 선에 그치지만 대규모 해외 광산 투자와 높은 제련·정제 공정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전기차의 전구체·리튬·양극재·음극재·배터리 시장을 장악했다. 세계 전기차 시장 점유율 1위인 CATL 등은 3년간 전체 배터리 사용량의 80%를 구매하는 것을 조건으로 반값 세일에 들어갔다.
문제는 우리나라가 핵심 광물을 대부분 중국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한국광해광업공단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반도체·배터리·디스플레이·경량 소재 등에 쓰이는 핵심 광물 33종의 수입의존도가 99.9%에 달했다. 4000여 종의 광물 중 첨단산업과 재생에너지의 핵심인 리튬·희토류·흑연·코발트·니켈·백금 같은 6대 핵심 광물도 예외가 아니다. 정부가 2030년까지 핵심 광물의 중국 수입 비중을 50% 이하로 낮추는 것을 목표로 잡고 있는 것만 봐도 우리가 얼마나 해외 자원 의존이 심한지 알 수 있다. 이평구 한국지질자원연구원(KIGAM) 원장은 “핵심 광물 광산 개발과 원료 소재 생산 현지화를 통해 탈중국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배터리사들과 자동차사들은 비상이 걸렸다. 우선 배터리사들은 세계 시장 점유율이 2022년 22.9%(SNE리서치)에 달하지만 원료 소재와 핵심 광물 생산은 전무한 실정이다. 현재 상태로는 미국의 FEOC 회피 규제를 맞추기 힘들어 2027년 1월 시행으로 2년 유예해달라는 의견을 최근 미국 정부에 제출했다. 배터리사와 현대자동차그룹은 배터리 핵심 광물 가치의 10% 미만인 흑연·코발트·지르코늄 등에 대해 FEOC 회피 규제를 한시적으로라도 면제해달라고 요청했다. 배터리 3사는 중국과의 합작 생산 공장 지분율 조정에 나서는 한편 미국의 FTA 체결국에 대한 광산 지분 투자 등에 나서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흑연만 해도 중국산을 대체할 공급망을 구축하려면 최소 3~4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삼성SDI가 최근 캐나다의 니켈 광산 개발사인 ‘캐나다니켈’의 지분 8.7%를 인수했으나 턱없이 부족하다. LG에너지솔루션·SK온·포스코퓨처엠·에코프로·LX인터내셔널 등도 공급망 다변화를 꾀해왔으나 한계가 있다. 이재령 강원대 에너지·인프라융합학과 교수는 “배터리 판매 가격이 하락한 데다 정책 불확실성마저 커져 기업들의 고민이 크다”며 “광물과 소재 가격 하락을 틈타 공급망 다변화에 매진하지 않으면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유럽연합(EU)이 지난해부터 배터리 수입 과정에서 전 주기 탄소 배출량 측정에 나선 것도 기업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경우 KIGAM 자원활용연구본부장은 “광물 채굴·가공 과정에서 환경이슈가 크게 증가했다”며 “선광·제련 기술을 고도화하고 녹색 발자국 광물 같은 저탄소 공정 기술을 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주관해 마련한 ‘공급망기본법’에 이어 최근 ‘국가자원안보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으나 핵심 광물·소재의 공급망 관리까지는 갈 길이 멀다. 내년 초 시행되는 이 특별법에는 해외 개발 자원의 국내 비상 반입 명령, 비축 자원 방출, 광산 증산, 주요 자원 할당·배급, 수출제한 등이 담겨 있다. 유경근 한국해양대 에너지자원공학과 교수는 “정부는 지난해 초 해외 자원 개발을 위한 금융·세제 지원 확대, 재자원화 기반 조성, 비축 확대, 국내 광산 개발 추진을 밝혔다”며 “하지만 국내 광산의 경우 개발 대상이 한정적이고 채산성도 맞추지 못해 개발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권오경 전 한국공학한림원 회장은 “핵심 광물의 탈중국, 글로벌 공급망 다변화를 위한 구호는 많지만 실행 전략은 다소 모호하다”며 "석유·가스처럼 핵심 광물의 자원민족주의 확산에 대응해 공급망 다변화와 기술 패권 구축을 위해 범부처 공조에 힘을 모아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