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 국적 해운사인 HMM의 운명이 기로에 섰다. KDB산업은행과 한국해양진흥공사는 하림그룹과 1차 매각 협상이 결렬된 후 다음 달 5일로 기한을 연장했다. 하지만 영구채 전환 등의 문제를 놓고 간극이 좁혀지지 않고 있다. 금융위원회와 산은은 빠른 매각을, 한진해운 파산의 생채기가 큰 해양수산부는 산업 논리로 맞서며 계속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이에 HMM 매각이 무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상황이 이런 데도 부처 간 이견을 조율할 컨트롤타워는 보이지 않는다. HMM 매각 과정에서 이를 논의할 산업경쟁력관계장관회의는 단 한 차례도 개최되지 않았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최근 “당분간 회의를 열 생각이 없으며 본계약이 체결되면 그 이후에 추진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이날 금융위·금감원 합동 증권 업계 간담회 뒤 홀로 기자들과 만나 “프로젝트파이낸싱(PF)은 일부 금융사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감내해야 하며 (부실 사업장은) 강도 높게 정리를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제대로 된 구조조정 대신 만기 연장을 통한 PF 연장이 이뤄지고 있다. 금융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모두가 4월 총선 이후 대규모 PF 구조조정이 한번에 쓰나미처럼 몰려올 것을 걱정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 원장과 기자들의 질의응답은 PF를 포함한 구조조정 문제를 1차로 총괄하는 금융위원장이 없는 자리에서 이뤄졌다. 특히 금감원장의 발언은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금융위·금감원 수장이 참여하는 ‘F4(Finance 4)’ 회의 기조와도 어긋난다. 금융위는 지난해 말 “F4 회의의 일관된 메시지는 PF와 건설업의 질서 있는 연착륙”이라고 밝혔다.
시장에서는 경제 부처 간 엇박자가 나면서 구조조정이 산으로 가고 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태영건설 때도 그랬다. 당시 이 원장이 윤세영 태영건설 창업회장을 직접 만나 워크아웃(기업 개선 작업)을 논의했다. 오너가가 태영건설 지분을 직접 갖고 있지 않음에도 “(태영이) 자신의 뼈를 깎지 않고 남의 뼈를 깎고 있다”며 강도 높은 압박을 하기도 해 논란이 됐다. 금융위가 빠진 자리를 금감원이 무리하게 메운 결과라는 지적도 나왔다. 전직 경제 부처 고위 관계자는 “최순실 사태 이후 책임질 것을 걱정한 관료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서 속도감 있는 구조조정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견 조율할 산경장 제 역할 해야…금융위·금감원 역할도 뒤바뀌어
문재인 정부 초대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었던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2018년 산업 경쟁력 강화 관계장관회의(산경장)를 통해 한국GM과 STX조선해양·성동조선해양 문제 등을 처리했다. 한국GM에 7억 5000만 달러(약 8048억 원)를 투입하면서 ‘먹튀’를 막기 위한 장치를 마련했고 STX는 자구계획안에 맞춰 처리 방침을 정했다. 성동조선은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택했다. 당시 결정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기재부가 중심을 잡고 공식 협의체인 산경장을 통해 구조조정을 해나갔다는 점은 높이 쳐줄 만하다는 게 관가의 시각이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 들어 구조조정 컨트롤타워의 역할이 아쉽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산경장만 해도 2022년 12월 추경호 전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이 정부서울청사에서 대우조선해양 정상화를 위한 전략적 투자 유치 진행 상황을 논의한 것이 마지막이다. 1년 넘게 열리지 않고 있는 셈이다. 산경장 회의는 윤석열 정부 들어 두 번만 열렸다.
당초 산경장은 2016년 6월 조선·해운사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신설됐다. 이전까지는 청와대 관계자와 금융위원장, 금감원장, 한국은행 총재가 참석하는 서별관 회의를 진행했는데 법적 근거가 없는 밀실회의라는 지적을 받았다. 이 때문에 공식 협의체인 산경장으로 바뀌었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 역시 산경장 출범 당시 기재부 1차관으로서 예산·세제 지원을 담당하는 경쟁력강화지원 분과를 맡은 바 있다.
산경장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구조조정을 1차로 책임지는 금융위는 뒤로 빠져 있다. 교체설이 있던 김주현 위원장이 유임된 후 전면에 나서지 않고 있는 가운데 검찰 출신 이복현 금감원장이 연일 초강경 발언을 이어가면서 구조조정과 금융정책 전반을 이끌어가는 모양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현재 금융위와 금감원 역할이 역전돼 있는 상태”라며 “금융위는 큰 그림을 그리고 금감원은 이를 이행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거꾸로 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금융위가 이슈를 끌고 가는 힘이 많이 약하다”며 “구조조정 프로세스가 보다 순탄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조금은 더 강한 힘을 가진 컨트롤타워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HMM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말 HMM 매각을 위한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과정이 KDB산업은행과 한국해양진흥공사가 파열음을 내면서 공회전을 거듭했음에도 제대로 된 이견 조율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대통령실이 나서서 HMM과 해진공 등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일까지 벌어졌다. 지금도 매각 측과 하림 간의 이견으로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지만 정부 차원에서 정책을 원활히 조정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게 인수합병(M&A) 업계의 시각이다. 투자은행(IB) 업계의 고위 관계자는 “HMM 매각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려는 산은과 산업 논리를 앞세워 이를 방어하는 해양진흥공사가 맞부딪히면서 우협 선정이 상당 기간 늦어질 정도로 문제가 많았다”며 “지금도 금융위와 산은은 시장 논리에 기울어져 있고 해수부는 공적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데 누구 하나 명확히 정리해주는 곳이 없다”고 밝혔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역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복현 금감원장이 증권사들을 향해 강도 높은 자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부실 사업장의 빠른 구조조정을 재차 주문하고 있지만 태영건설 워크아웃 이후 지금까지 별다른 진척이 없다. 전국 3000여 개 PF 사업장 가운데 실제 대주단을 구성하고 구조조정에 들어간 현장은 지난해 8월 말 기준 187개에 불과하다. 상당수 PF 사업장은 시행사의 상황 호전을 기대하면서 만기만 연장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제라도 구조조정 컨트롤타워를 분명히 하고 산경장 같은 공식 회의체를 통해 구조조정 속도를 높여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현재 기재부와 한국은행·금융위·금감원 수장이 만나 비공개로 정책 현안을 논의하는 이른바 ‘F4(Finance4)회의’가 있지만 공식 협의체가 아닌 한계가 있다. ‘F4’ 회의는 속기록도 남기지 않는다.
정부 안팎에서는 미국의 기준금리 인하가 예상과 달리 올 3분기로 더 늦어질 수 있는 만큼 구조조정을 미루고 금리 인하만 기다리기보다는 더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금융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구조조정을 담당하는 공직자들이 크게 다치는 관행이 형성돼 있다”며 “총선을 앞두고 몸 사리기가 더 심한데 공무원들이 소신 있게 판단할 수 있도록 국회에서 관련 법률을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