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관점] 보증에 기댄 PF 한계…“시행사 자본 높이고 사업성 우선 대출해야”

◆부동산PF 위기 반복과 해결 방안

시공사 보증 의존…대규모 PF 부실로 연쇄부도 반복

터무니없이 낮은 시행사 자본비율 점진적 인상해야

미래 사업가치 평가해 대출하는 선진금융으로 전환

위기 극복 위해 할인분양·세제 지원·체질 개선 필요





1970년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영국 은행가들에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보여주며 조선소 건설 자금 대출을 따냈다는 일화는 실은 생략과 과장이 꽤나 버무려진 스토리다.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는 우리 경제사의 가장 성공적인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례라고 할 수 있다. PF란 사업의 미래 가치를 담보로 자금을 빌리는 금융 기법이다. 물적 담보나 차주의 신용보다는 프로젝트 자체의 사업성을 평가해 자금을 빌려주는 것이 바로 PF다. 머나먼 동양에서 온 맨손의 사업가가 사업 계획만으로 조선소 건설 비용을 빌린 것은 사전적 정의에 충실한 PF라고 할 수 있다. PF는 장기간 돈이 많이 투입되는 대규모 개발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서구에서 발달해온 금융 기법이다. 수에즈운하 개발 금융이 효시였고 1920~1930년에는 미국 유전 개발 붐의 돈줄이 되기도 했다.



유용한 개발금융 수단인 PF의 대규모 부실 위기가 한국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2011년 저축은행 사태 이후 10여 년 만에 PF 부실 위기가 도래했다. 2022년 말 레고랜드 사태부터 시작된 이번 PF 부실 위기는 지난해 말에는 태영건설을 워크아웃으로 몰아넣었다. 아직은 전초전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많다. 금융감독 당국이 올해 들어서야 금융사들에 전국 3000개의 PF 사업장에 대한 건전성 관리를 압박하고 있어서 4·10 총선 이후부터 무너지는 사업장이 줄을 이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2011년 저축은행 사태와 닮은 꼴


2011년 저축은행 사태와 최근 PF 위기의 원인은 닮은꼴이다. 2008년 금융위기로 부동산 경기가 급랭하고 미분양이 증가하자 부동산 개발의 PF 대출에 지급보증을 섰던 건설사들이 대거 부실화됐다. 당시 아파트 미분양은 2007년부터 늘어나기 시작해 2008년 16만 5599가구, 2009년 12만 3297가구, 2010년 8만 8706가구에 달했다. 건설사의 보증을 믿고 PF 대출에 나선 저축은행들도 도미노 부도 사태를 맞았다. 2011년 1월 삼화저축은행을 시작으로 3년간 파산한 저축은행만 30여 곳에 달했다.

이번에는 고금리라는 충격파가 분양 시장을 덮치며 PF 대출 부실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금융감독원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저축은행 79곳은 당기순이익이 전년보다 2조 1181억 원 감소해 5559억 원의 손실을 낸 것으로 집계됐다. 저축은행들이 적자를 낸 건 2011년 저축은행 사태 여파가 남아 있던 2014년 이후 처음이다. 당국에서는 연체율 등을 고려할 때 아직 우려할 상황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PF 대출 연체율은 2012년 말 13.6%에 달했으나 지난해 말 기준 2.7% 수준이다. 또 지난 연말 미분양 아파트도 전국 6만 2000여 가구였다.

그러나 안심할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우선 PF 대출 규모가 과거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논거다. 건설산업연구원은 2011년 부동산 PF 규모를 약 100조 원으로 추산했다. 지금은 두 배가 넘는 202조 6000억 원 수준이라는 게 이 연구원의 계산이다. 은행권 등 6개 금융업권 135조 6000억 원(2023년 말)에 토지담보대출 10조 원, 새마을금고 대출 15조 7000억 원(2023년 9월 말)과 PF 유동화 증권 42조 1000억 원을 합친 금액이다.

게다가 과거보다 비(非)수도권·비거주용 부동산 관련 PF가 많은 것도 우려되는 대목이다. 우후죽순 생겨난 시행사들이 지방의 오피스텔, 지식산업센터, 생활형숙박시설 등의 개발을 추진했다가 브리지론 단계에서 본PF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번에는 저축은행을 넘어 증권사·상호금고·새마을금고·신탁사까지 얽혀 있는 점도 다르다. 저축은행에 대한 규제가 강화된 후 그 빈자리를 다른 제2금융권이 채우면서 PF 대출 기관이 더 광범위해졌다. 김정주 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기존보다 절대적으로 늘어난 부동산 PF 규모, 복잡해진 부실 위험 파급 경로, 손실 흡수력이 부족한 제2금융권과 중소 건설사에 위험이 집중된 구조 등으로 인해 부동산 PF 부실에 따른 손실과 파장은 예상보다 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익은 사유화, 손실은 사회



다시 찾아온 PF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대증요법과 근본 체질 개선 등 두 가지 방안을 병행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단기적으로는 경제·사회적 파장을 최소화하면서 신속하게 부실을 정리하는 한편 장기적으로는 대규모 PF 위기가 반복되지 않도록 대출 구조 개선 방안을 마련하는 등의 투트랙 접근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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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급하게는 시행사의 할인 분양 등의 자구책과 함께 대주단의 금리 인하 등의 지원책이 필요하다. 정부도 자칫 건설사의 도미노 부도 사태로 번지기 전에 분양률을 높이기 위한 정책적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김명수 나이스신용평가 대표이사는 “부동산 구매를 멈추고 관망세로 돌아선 가계들이 매력적인 분양가와 금리 조건, 각종 세제 혜택을 보고 다시 매수세에 동참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며 “다만 PF 문제를 빅뱅 방식이 아닌 풍선에서 바람을 빼듯이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또 당면 과제로 PF 대출에 대한 체계적인 모니터링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을 꼽았다. 지역별, 사업장별, 부동산 유형별 PF 대출 정보가 부재한 상황에서 금융회사·시행사·시공사 등이 경영 판단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지혜 국토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 가장 시급한 것은 PF 대출 정보에 대한 시스템을 구축해 모니터링하는 것”이라며 “이를 통해 무분별한 대출 증가나 쏠림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PF 대출 시장의 근본적인 체질 개선 방안을 정교하게 마련하는 것도 중장기적으로 중요한 과제다. 우선 개발 사업에서 시행사들의 터무니없이 작은 자기자본 투입이 PF 시장을 왜곡해온 만큼 이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시행사들은 사업비 기준 5~10% 수준의 종잣돈만 들고 부동산 개발에 뛰어들어 수십~수백 배의 대박을 터트리는 고수익을 누려왔다. 그러나 손실이 발생하면 보증을 선 건설사와 대출을 해준 금융회사가 막대한 부실을 떠안고 시행사는 소액의 자본금만 날리는 불합리한 수익 구조였다. ‘이익은 사유화, 손실은 사회화’되는 셈이다. 정부도 이 같은 문제 의식 하에 사업 실패에 따른 시행사의 책임을 강화하기 위해 개발업자들의 자기자본 비율을 20% 수준으로 올리는 방안에 대한 연구 용역을 발주했다. 황민 조지워싱턴대 교수는 “미국에서는 시행사가 대출을 받아서 땅을 사는 것이 힘들다”며 “기관투자가(LP)들의 돈까지 모아서 시행 전문가(GP)가 땅을 매입하고 사업 계획을 세우고 나면 그 땅을 담보로 은행들이 건설 자금을 대출해주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황 교수는 “한국은 시공사에 리스크가 집중돼 있다”며 “수익자 부담 원칙에 맞춰 리스크를 분산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다만 성급한 자본 규제는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으므로 신중해야 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해외와 다른 개발 환경에서 갑작스러운 자기자본 규제 도입은 공급 위축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는 게 개발 업계의 주장이다. 김승배 한국부동산개발협회장은 “해외 주택 사업은 건설 기간이 짧고 소규모인 데 반해 한국은 대단지 아파트가 많아 사업비의 20%를 조달할 능력이 있는 시행사는 극히 제한적”이라며 “분양가 규제가 있는 한국에서는 해외의 사모펀드와 같은 초기 위험 자본 투자자를 구하기도 힘들다”고 지적했다.

개발 이익 기반 대출 이뤄져


시행사의 자본 비율을 높이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저축은행들은 2011년 이후 이미 ‘시행사 자본 20%룰’을 적용해 PF 대출을 실행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PF 부실이 재발하자 저축은행은 되레 더 큰 손실을 냈다. 지난해 말 기준 PF 대출 연체율은 은행 0.35%, 보험사 1.02%. 여신전문회사 4.65%, 상호금융 3.12% 수준인 데 반해 저축은행은 6.94%까지 치솟았다. 금융감독원의 고위 관계자는 “소위 ‘20%룰’을 저축은행만 적용하다 보니 우량한 사업장은 다른 금융업권에 몰리고 상대적으로 사업성이 떨어지는 개발 사업의 차주들만 저축은행을 찾았다”며 “결국 차주의 자본 비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업성에 따른 대출”이라고 말했다.

핵심은 시공사의 보증에 기댄 ‘무늬만 프로젝트 파이낸싱’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다시 정주영 회장의 일화로 돌아가면 그 시절 거액의 PF 대출을 해준 바클레이스은행의 결정이 오히려 놀라운 대목이다. 그만큼 꼼꼼한 검증과 사업성 분석 노하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시공사의 보증에 기댄 ‘한국형 PF’ 대출 방식이 한계에 봉착한 만큼 철저하게 사업성 분석에 기반한 PF 대출 구조로 전환하도록 감독 규정과 대출 관행 등을 정비해야 한다. 이보미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에서는 부동산 PF 대출 심사나 유동화 증권 발행 시 시공사의 신용등급과 신용 보강이 가장 중요한 평가 항목으로 작용한다”며 “개발이익에 대한 평가에 기반한 부동산 금융이 발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대규모 PF 부실을 막는 근본적인 해법”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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