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회 추천을 받은 약대 교수가 참여한 심의위원회의 승인 없이는 부가조건을 완화해주기 어렵다니요? 약사회는 엄밀히 화상투약기에서 취급하는 의약품의 협의 대상도 아닙니다.”
박인술 쓰리알코리아 대표는 “정부 약속을 철썩 같이 믿었는데 언제쯤 다음 단계 사업이 가능할지 기약조차 없다”고 말했다. 약국이 문을 닫는 늦은 밤 또는 공휴일에 약사와 원격상담으로 일반의약품 구매가 가능한 화상투약기가 또 다시 멈췄다. 약국이 아닌 장소에서 의약품 판매를 금지하는 현행 약사법에 10년 넘게 발이 묶였다가 시범사업 형태로 첫 발을 뗐는데 이번에는 주무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보건복지부의 서로 떠 넘기기에 발목이 잡혔다.
29일 정부와 업계에 따르면 작년 3월 규제샌드박스 실증 특례를 시작한 ‘일반의약품 스마트 화상판매기(화상투약기)’가 1단계 사업 평가를 마친지 9개월째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화상투약기는 약사 출신인 박 대표가 긴급 상황에 처한 환자의 불편을 줄이기 위해 2012년 개발한 일명 ‘의약품 자동판매기’다. 기계 전면에 모니터와 음성 송수신 장비가 장착돼 환자가 모니터를 통해 증상을 말하면 전문약사가 원격으로 맞는 약을 추천해준다. 약국이 문을 닫은 시간 의사 처방전 없이 구매 가능한 일반의약품을 바로 살 수 있다.
화상투약기는 시범사업 시작까지 무려 11년이 걸렸다. 일반의약품 판매장소를 약국으로 제한한 현행 약사법 때문인데 무엇보다 약사 단체의 반발이 컸다. 2013년 인천 부평, 2021년 경기 용인 소재 약국 앞에 설치됐다가 지역약사회의 반발로 철거됐고 약사법 개정 시도도 불발됐다. 개발사인 쓰리알코리아는 규제 샌드박스 특별법에 희망을 걸었지만 이마저도 녹록지만은 않았다. 2019년 실증특례를 신청한 지 3년 만에 정보통신기술(ICT) 규제샌드박스심의위원회 회의에 올랐고 조건부 승인을 받고도 과기부와 복지부의 현장 실사, KC 인증 등의 절차를 밟느라 9개월 뒤에야 1단계 사업에 돌입했다.
규제샌드박스심의위는 승인 당시 화상투약기에서 취급할 수 있는 일반의약품을 해열·진통소염제, 진경제, 안과용제, 항히스타민제, 진해거담제, 정장제, 하제, 제산제, 진토제, 화농성 질환용제, 진통·진양·수렴·소염제 등 11개 효능군의 53개 품목으로 제한했다. 3개월 동안 수도권 약국 10곳에서 시범 운영한 뒤 안전성 등의 문제가 없으면 전국 단위 최대 1000대로 확대한다는 방침이었다. 계획대로라면 작년 6월 말까지 1단계 사업을 종료하고 10월부터 2단계에 진입했어야 한다. 예상보다 늦어진 작년 8월 1단계 사업 중간평가와 함께 2단계 사업의 부가조건을 논의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고려해도 9개월 가까이 지체된 셈이다.
사업 진행이 더딘 이유는 의약품 판매 범위 확대가 꼽힌다. 쓰리알코리아는 기존에 취급 중인 11개 품목 외에 건위소화제, 기타의 소화기관용약·순환계용약·외피용제, 외피용 살균소독제, 사전피임약, 치과구강용제, 이비인후과용제, 수면유도제, 기타 화학요법제, 기생성 피부질환용제, 이담제, 소화용 궤양용제 등 13개 약효군을 확대해 달라고 요구해 왔다. ‘마데카솔’ 같은 상처치료제, 소화제 등 일반인들의 수요가 높은 일반의약품조차 판매가 제한돼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였다.
과기부의 사업 부가조건에 따르면 약국개설자, 복지부, 사업자가 협의해 약효군 변경이 가능하다. 복지부가 사업 진행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얘기다. 과기부 관계자는 “업체가 약효군 확대를 신청해 이달 초 복지부에 공문을 보냈다”며 “국조실 가이드라인상 60일 이내 답변을 주도록 되어 있는 만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쓰리알코리아는 “(2단계 사업을) 3개월 안에 시작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한 게 작년 8월”이라며 “복지부가 약사회 눈치를 보느라 불필요한 시간끌기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대한약사회는 화상투약기가 규제샌드박스 승인을 받자 삭발 투쟁과 대규모 반대 시위를 벌이며 강력 반발했다. 화상투약기 관련 규제샌드박스 심의위원회에 수차례 참여했던 전문가도 이 같은 정부 행태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추연식 경북대 생물학과 교수는 “화상투약기에서 취급하는 일반의약품의 변경은 규정상 약국개설자와 복지부, 사업자 협의하면 되는데 9개월 가까이 소요될 사안이 아니다”라며 “그동안 정황을 고려할 때 약사단체의 부정적인 시각 등이 사업 진행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