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악은 전쟁이다. 전쟁은 당사자들 뿐 아니라, 그 이후 세대까지도 끝없는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모리스 알박스는 모든 개인의 기억은 집단 속에서 구성된다는 ‘집단기억’의 개념을 제시했는데, 이는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기억이 지금까지 전승된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에게 익숙하지는 않지만 1900년대 후반 벌어진 레바논 내전 역시 레바논인들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고 있다.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제자가 스승을 모욕하고, 군인이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 인륜을 거스르는 일들이 수도 없이 자행됐다. 직접 내전의 참상을 경험한 레바논 출신의 캐나다 작가 와즈디 무아와드는 자신의 전쟁 4부작을 통해 전쟁의 비극을 고발하고, 동시에 전쟁의 아픔을 승화시켰다.
서울시극단의 올해 두 번째 레퍼토리 ‘연안지대’는 전쟁 4부작의 첫 번째 작품으로, 국내 초연작이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접한 아들 윌프리드는 아버지의 시신을 묻을 땅을 찾아 나서지만, 그렇게 도착한 아버지의 고향은 시신 하나 묻을 땅이 없을 정도로 참혹한 전쟁의 현장이었다. 가족을 잃고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알리고자 동분서주하는 시몬,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아메, 가정을 잃고 웃음짓는 것 말고는 할 수 없게 된 사베 등과 윌프리드는 아버지 누일 곳을 찾기 위해 여정을 떠난다. 연극은 그 속에서 전쟁이 만들어낸 악순환을 지금 당장에라도 끊어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종교적 상징과 함께 강렬하게 보여준다.
2000년 전 인류의 원죄를 모두 짊어진 희생 제물 예수 그리스도처럼, ‘연안지대’ 속 죽은 아버지인 이스마일도 이후 세대를 위한 대속물이 되면서 연극이 마무리된다. 십자가처럼 보이는 조명과 함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처럼 시신을 들고 있는 어머니, 그리고 추방자이자 인도자를 뜻하는 이름 ‘이스마일’까지, 기독교적 이해가 있다면 연극을 더욱 풍부하게 관람할 수 있다.
하늘로 올라간 예수와 달리 바다 속으로 수장되는 것도 대조적이다. 이스마일이 다음 세대를 위해 던지는 “길을 향해 지칠 때까지 걸어가. 기쁨 끝에서, 시간 끝에서 화를 내고 분노를 토해내. 사랑과 고통 바로 너머에 기쁨과 눈물, 상실과 외침, 연안지대와 거대한 바다가 있지”라는 대사는 묵직한 감동을 더한다.
‘이 불안한 집’ ‘손님들’을 연출한 김정이 연출을 맡았고, ‘리어’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등에 참여한 이태섭이 무대 디자인을 담당했다. 드뷔시의 ‘몽상’을 모티브로 한 사운드디자인과 물의 이미지를 표현한 무대 연출이 매력적이다. 윤상화가 이스마일을, 이승우가 윌프리드를 연기한다. 김 연출은 “우리는 진정 죽음을 애도하고 있나 반문하게 된다”며 “여전히 폭격은 쏟아지지만 이전 세대의 응원을 받고 나아가는 다음 세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공연은 30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