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서울이 폼페이처럼 화산재에 뒤덮이고 1000년 후 고고학자에 의해 발견된다고 상상해보자. 미래의 고고학자는 무엇을 발굴하게 될까. 우리가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과 신발, 굳어버린 인간의 시신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야 당연하겠지만, 각국 순회전시를 하던 유럽의 고대 유물이 한 지역에서 발견될 수도 있다. 3024년을 살고 있는 고고학자들은 이 유물들이 왜 서울에 있는지 뜨거운 논쟁을 펼칠 것이다. 어쩌면 고대 그리스인들이 서울에서 살기도 했다는 이상한 결론에 이를지도 모른다.
이 같은 기발한 상상을 조각과 회화로 승화시킨 예술가 다니엘 아샴(43)의 개인전 ‘서울 3024-발굴된 미래'가 지난 12일 서울 잠실 롯데뮤지엄에서 개막했다. 작가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시간’이다. 그는 ‘상상의 고고학’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개념을 동원해 관객들에게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존재’를 탐구하도록 이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상상의 고고학에 기반한 작품 250여점을 선보인다.
작가는 2010년 남태평양 이스터섬을 방문해 유물 발굴 현장을 목격한 후 ‘상상의 고고학’이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과거의 유물로 현 시점의 역사를 추적하는 고고학자에게서 영감을 받은 작가는 미래에서 현재와 과거를 바라보면서 시간을 초월한 자신을 만나는 것을 작품 제작의 목표로 삼았다.
전시는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된 고전적인 조각상 '아를의 비너스'를 재해석한 '푸른색 방해석의 침식된 아를의 비너스'로 시작한다. 이 작품은 '아를의 비너스'를 부분적으로 파손하고, 푸른색 석고와 방해석이 군데군데 새싹처럼 튀어나온 모습을 하고 있다. 과거에 제작된 조각이 시간이 흐르면서 변형되는 모습을 통해 미래의 한 단면을 상상하게 만든다.
전시관 안쪽에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등장한다. 인공지능(AI)을 활용해 한 화면에 각각 고대와 현대의 우상을 상징하는 고전 조각상과 애니메이션 캐릭터 형상을 나란히 배치한 '분절된 아이돌' 시리즈, '포켓몬' 캐릭터 중 시간여행을 하는 세레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간의 파문' 영상 역시 흥미롭다.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발굴 현장’이다. ‘상상의 고고학’이라는 작가의 철학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난 이 작품은 3024년 폐허가 된 서울의 발굴 현장을 보여주는 장소 특정적 설치 작품이다. 현장에서 발굴된 유물은 핸드폰, 카메라, 신발, 모자 등 일상적인 물건이다.
유물들은 마치 폼페이 유적지에서 발견된 고대 유물처럼 석고, 화산재로 뒤덮여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조각하지 않고 주조하고, 인위적으로 부식시켰는데 이런 제작 방식은 실제로 작품이 어딘가에서 발굴된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발굴 현장’이 있는 공간에서는 3024년 서울 북한산을 배경으로 한 대형회화 2점도 만나볼 수 있다. '3024년 북한산에서 발견된 헬멧을 쓴 아테나'와 '3024년 북한산에서 발견된 신격화된 로마 조각상'은 북한산과 고대 그리스 조각상을 통해 혼재된 시간 속에 사라진 인간의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전시장은 하얀색 동굴처럼 만들어졌다. 전시장 곳곳에 서 있는 보조 인력들 역시 하얀색 가운을 입고 있어, 관람객들은 마치 지금 막 발굴된 유적지를 탐험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전시장이 이처럼 무채색으로 꾸며진 데는 이유가 있다. 사실 작가는 ‘색맹’이다. 그의 초기 작품에는 대개 색상이나 색감이 배제돼있다. 하지만 최근 색감을 교정하는 안경 렌즈를 만드는 회사의 도움을 받아 비교적 다양한 색을 반영하고 있다. 작가는 “저의 스튜디오에 가면 각각 색상에 12가지가 넘버링이 되어 있는데, 이게 어떤 색깔인지 추측을 하기보다는 숫자에 도움을 받아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작가는 ‘예술은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며 티파니앤코, 크리스찬 디올, 포르셰 등 하이브랜드와 협업하고 있다. 전시 공간 끝부분에서는 작가가 이들 브랜드와 협업하면서 자신의 ‘시간’ 개념을 어떻게 적용했는지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전시는 10월 3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