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간이 고픈 부모와 유연근무 [로터리]

주형환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





“내가 죽으면 서울로 출퇴근하다 죽은 줄 알아.”



몇 년 전 정주행하며 본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 나오는 대사다. 오죽했으면 저런 말을 했을까 싶게, 드라마 속 3남매는 경기도 외곽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느라 파김치가 된다. 회사에 도착하면 일하기도 전에 이미 방전돼 있다. 퇴근하면 침대에 쓰러지기 바쁘다. 너무 긴 시간과 에너지를 길에서 버리고 있다.

실제로 국토교통부 대도시권광역교통위원회 발표에 따르면 2022년 수도권과 광역시의 하루 평균 출퇴근 시간은 116분이다. 수도권만 보면 120분이 걸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16년 회원국 평균 통근 시간은 28분이지만 한국은 2배가 넘는 58분이었다. 다른 데이터를 봐도 한국의 통근 시간은 국제 평균보다 길다.



오전 9시 출근, 오후 6시 퇴근도 만만찮은데 칼퇴근마저 어렵다. 여기에 2시간에 이르는 통근 시간과 집안일까지 감안하면 직장인 부모가 자녀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은 너무 적다. 2015년 OECD ‘삶의 질 보고서’를 보면 한국 부모의 자녀 돌봄 시간은 2시간에 이르는 통근 시간의 반도 못 미치는 하루 48분에 불과하다. 이처럼 긴 통근 시간은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좀먹고 저녁이 있는 삶을 앗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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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부모들은 늘 ‘시간’이 고프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올해 4월 진행한 ‘결혼·출산·육아에 대한 인식조사’에 따르면 맞벌이 부모들은 일·가정 양립을 이루기 위해 ‘육아 시간 확보가 가장 필요하다’고 답했다. 육아 시간에 대한 지원이 증가할 때 출산 의향도 높아졌다.

정부가 6월 ‘저출생 추세 반전 대책’을 통해 육아휴직 급여 인상과 기간 확대, 단기 육아휴직 도입과 더불어 재택근무와 시차출퇴근제에 대한 장려금을 지원하는 것도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부모에게 내어주기 위해서다. 정부는 유연근무를 촉진하기 위해 앞으로 사업체별 유연근무 실태를 정확히 조사해 그에 맞춘 활성화 방안도 보강해나갈 계획이다.

유연근무는 직장인 부모의 육아를 돕기 위해서만 필요한 게 아니다. 함께 웃고 장난치며 스킨십을 나누는 행복한 경험을 늘려주는 일이다. 아이들에게도 자연스럽게 가족의 가치를 전하는 기회다.

하지만 한국의 유연근무 활용 비율은 팬데믹 이후 감소 추세다.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팀이 전 세계 직장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재택근무 실태조사에서 한국은 주당 평균 0.4일로 34개국 중 꼴찌였다. 반면 미국은 엔데믹 후 재택근무를 정착시켰다. 미국 노동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미국 근로자의 35%가 일부 또는 전 업무를 재택근무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한국 기업들도 체질을 바꿀 때다.

행복은 멀지 않다. 함께 밥 한 끼라도 먹는 게 식구라고, 같이 밥 먹고 웃고 떠드는 시간이 가족의 행복을 키운다. 유연근무는 기업과 직장인 부모가 함께 더 나은 미래를 그려가는 방법이다. 기업의 적극적인 동참과 한국 기업에 맞게 출근과 재택근무를 병행하는 ‘하이브리드 워크’가 절실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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