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이달의 과학기술자상] 金大起 SK케미칼 생명과학연구소장

국산 신약 1호 선플라의 개발 주역인 SK케미칼 김대기(金大起·43) 박사는 신약개발 과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신약개발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약 설계사, 유기화학자, 약리학자, 수의학자, 임상학자 등 연구개발에 참가한 사람들 사이에 완벽한 조화가 이뤄져야만 하기 때문이다.겉보기에도 털털해 보이는 그는 부산 개금동에서 트럭운전을 하는 아버지의 2남2녀중 맏이로 태어났다. 고학으로 고등학교(부산 동래고)와 대학(서울대 약대) 공부를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친 79년부터 82년까지의 기간을 그는 스스로 약장수였다고 표현했다.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이었으므로 유학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돈을 벌어야 했다. 그래서 작은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방배동에 약국을 차렸다. 운이 좋아서인지 장사가 잘 돼 얼마 지나지 않아 유학경비는 물론 집안의 부채까지 해결 할만한 돈을 벌 수 있었다.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86년 약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미국 ICN-핵산연구소에서 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그는 하마터면 실명할 뻔한 사고를 당했다. 87년 1월1일 아무도 없는 실험실에 혼자 나와 전날 혼합해 놓았던 액체 암모니아가스가 든 용기를 들춰보는 순간 암모니아가스가 왼쪽 눈을 확 쐈다. 고통스러워 펄펄 뛰는 장면이 회사 무인 카메라에 잡혀 다행히 위기는 모면했다. 그 사고 이후로 INC는 모든 연구원에게 눈 보호용구를 지급했다고 한다. 87년 귀국 후 한국화학연구소에서 일하던 그는 2년 뒤 항암제에 유난히 집착을 보인 SK케미칼 책임연구원으로 입사했다. 항암제 개발에 특별히 관심이 많았던 고(故) 최종현(崔鍾賢) 회장은 연구팀에게 일년에 4번씩이나 브리핑을 받으며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었다. 그러나 선플라를 개발했을 때 崔회장은 이미 고인이 돼있었다. 생전에 그토록 보고싶어 하던 암치료제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뜬 것이다. 연구팀은 崔최장의 유골이 안치된 곳을 찾아 선플라를 영전에 바쳤다고 한다. 신약개발을 하며 가장 어려웠던 것은 임상시험이었다. 金박사는 『위암 환자가 국내에서 매년 1만6,000명이나 새로 발생하고 있지만 임상시험 대상자를 모집하기가 몹시 어려웠다』며 『적합한 대상자를 찾아도 자신이 실험용 쥐가 된다는 생각 때문인지 대부분 기피해 안타까웠다』고당시 심정을 털어놨다. 임상과정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97년 2명의 환자가 선플라 투약 후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한 명은 뇌출혈이 사인(死因)이어서 괜찮았지만 다른 사람은 패혈증으로 사망해 논란이 많았다. 6개월간 임상시험 중지명령을 받아 속이 까맣게 탔다고 한다. 임상시험에 사용하는 동물들을 구입하는 데도 돈이 만만찮게 들었다. 한 마리에 100만원이나 하는 「비글」개 50마리와 쥐 1만 마리가 실험에 사용됐다. 쥐 가운데 1,000마리는 마리당 5만원하는 「누드 마우스」였다. 선플라는 항암효과가 뛰어나면서도 부작용은 적은 약이다. 가격도 외국제품이 1개월 투여량을 기준으로 200∼300만원 이나 하는데 비해 선플라는 40만원 정도 밖에 안된다. 위암환자들에게 경제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현재 250명이 넘는 환자들이 선플라로 부작용 없이 암치료를 받고 있다. 약력 56년 부산 출생 73년 부산 동아고 졸업 77년 서울대 약대 졸업 86년 미국 뉴욕주립대 약학박사 86년 미국 INC-핵산연구소 연구원 87년 한국화학연구소 선임연구원 89년 선경인더스트리 생명과학연구개발실 책임연구원 95년 특허기술상 수상 98년 SK케미칼 생명과학연구소장(상무) 99년 국산 신약 1호 선플라 시판허가 획득 임동석기자FREUD@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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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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