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뉴질랜드/「기업형정부」… 80년대 파산위기 극복(경제를 살리자)

◎전문경영인 출신이 예산·사업총괄… 효율성 높여/중앙은 독립… 인플레 2%내 억제 위업어느 나라에나 국민들이 정부 하는 짓을 보고 넌더리를 내도록 만드는 구석이 있게 마련이다. 경제부처들이 몰려 있는 우리나라 과천 제2종합청사는 일년 내내 공사를 하지 않는 날이 없다. 멀쩡한 블록을 파헤치고 새것으로 바꾸거나 주차장 한켠을 밀어내고 공원으로 조성했다가 어느날 다시 아스팔트를 깔기도 한다. 뉴질랜드에선 이런 낭비를 찾아볼 수 없다. 재미있는 모양 때문에 「통벌집(Beehive)」으로 불리는 웰링턴 국회의사당 앞 보도는 성한 귀퉁이가 거의 없을 정도로 낡아 있다. 한 블록 건너편의 정부빌딩도 고색창연하다. 그런 형편인데도 수시로 강풍이 불어와 「바람의 웰링턴(Windy Wellington)」을 휩쓴다. 웰링턴의 바람은 그야말로 개혁의 바람이라 부를 만하다. 뉴질랜드는 정부 예산제도에 기업의 발생주의회계 방식을 도입, 행정서비스의 효율을 비용편익 개념으로 산출하고 있으며 행정의 경영화와 정부재정의 기업화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행정 책임자도 전문경영인 출신이고 관료들도 기업인을 닮아 있다. 기업형 정부 시스템을 구축해놓은 모습이다. 한때 이 나라는 양모와 버터 수출로 세계 3위의 고소득국가(49년)였지만 동시에 「규제의 지옥」이기도 했다. 양모 이외의 소재로 카펫을 만드는 것은 불법이었고 의사처방 없이는 버터 대신 마가린을 사먹을 수도 없었다. 정부가 모든 일에 앞장서다 보니 기업인들은 경영현장보다 관료들의 사무실에서 더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결국 80년대 초반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꼴찌군으로 전락했고 외국에서 돈빌리기마저 힘들어져 파산 직전에 이르렀다. 이런 뉴질랜드를 지옥에서 건져낸 것은 대개혁이었다. 개혁의 바람은 지난 84년 경제재건을 공약으로 내걸고 집권한 노동당정부의 획기적 규제완화 정책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10여년에 걸친 경제살리기 개혁의 성과가 이제서야 겨우 나타나고 있다. 뉴질랜드는 지난 95년 경제성장률 5.5%, 국내총생산(GDP)의 3%에 이르는 재정흑자를 달성했고 5년 연속 인플레율을 2% 이하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이는 75∼84년 10년간의 평균성장률 1.8%, GDP 9% 규모의 재정적자에 비하면 그야말로 환골탈태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뉴질랜드의 기업형 경제는 무엇보다 지난 89년 제정된 공공재정법(Public Finance Act)에 근거하고 있다. 이 나라 관리들은 「정부가 무엇에 돈을 써야 하고 무엇에 낭비하면 안되는가」 하는 데 대한 기준이 명확하다. 기준은 시장주의 경제원리에 입각해 있다. 이들의 정책결과는 고객(국민·기업)에 대한 서비스 제공이란 측면에서 생산행위로 간주된다. 정책 시행이 가져온 생산활동이 경제적 효율성에 미달하면 조직이나 정책입안자가 가차없이 도태된다. 각 정부부처나 공공기관은 재무부로부터 예산을 타내 이를 각자의 주거래은행에 입금해놓고 투자(지출)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쓴다. 자금을 효율적으로 활용해 지출을 아꼈다면 이자수입 등의 인센티브를 얻는다. 방만한 경영으로 적자를 기록하면 재무부로부터 가혹할 만큼의 페널티를 부과당한다. 그렇다고 예산을 아끼기 위해 대고객 활동을 소홀히 할 수도 없다. 각 정부조직은 매년초 의회에 전년의 경영실적을 제출하고 엄격한 심사를 받는다. 이러니 예산당국은 까다롭게 굴 이유가 없다. 각 부처가 사업활동 및 자금현황 등 정보를 수시로 제공한다는 전제만 있으면 예산을 깎기 위해 굳이 칼을 휘두를 필요가 없다. 오히려 투자 가이드북을 발간해 보급하는 등 정부조직의 경영활동을 측면 지원한다. 우리나라 O기업의 L사장은 지난 95년 현지 투자를 위해 뉴질랜드에 왔다가 색다른 경험을 했다. 미리 파견한 직원들은 오클랜드시가 마련해준 임시사무실에서 편하게 작업하고 있었고 『시 관계자를 만나고 싶다』고 말을 꺼내자 곧바로 부시장이 나타났다. 브루스 앤더슨 당시 부시장은 L사장의 손을 굳게 잡고 악수를 하더니 『공장예정부지에 가보자』며 그를 옆에 태우고 직접 차를 몰고 나가는 것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공무원같지 않았다. 알고 보니 부시장은 전문경영인 출신이었다. 뉴질랜드 각 정부조직의 책임자는 「사무차관」으로 이름붙여진 전문경영인들이다. 이들이 경영인이란 것은 최고경영자를 의미하는 이들의 공식명칭(CE·Chief Executive)에서도 잘 나타난다. 사무차관이 조직의 예산편성부터 투자, 직원고용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영」을 책임진다. 장관은 재량껏 사무차관을 고용한다. 장관의 일은 사무차관의 실적관리 원칙을 규정하는 「납품구입계약서」를 작성해 고용계약을 맺고 월별 재무보고를 통해 점검과 지시채널을 확보하는 정도다. 사무차관이 자신의 경영수완을 정부에 납품하는 셈이다. 무사안일이나 비리가 있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중앙은행은 정부로부터 완전히 독립돼 있다. 중앙은행총재도 재무부장관과의 공개계약으로 선임된다. 중앙은행의 유일한 목표는 물가안정. 연간 인플레율을 2% 이하로 누르는 게 중앙은행총재의 사명이다. 물가잡기에만 성공하면 어떤 정책을 써도 뭐랄 사람이 없다. 급속한 개혁이 고통을 초래한 것도 사실이다. 정부보조가 없어지자 목축업 도산이 잇따랐고 땅값이 폭락했으며 민영화와 정부조직 개편에 따라 4만명 가량의 공무원이 일자리를 잃었다. 그러나 개혁은 국민과 기업에 편안한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폭넓은 호응을 이끌어 더욱 힘을 얻었다. 제임스 볼저 뉴질랜드 총리는 지난 93년 우리나라를 방문, 김영삼 대통령에게 『한국 개혁의 비결은 뭐냐』고 질문했다. 그러자 김대통령은 『깨끗한 정부를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함으로써 국민의 믿음을 높일 수 있었다』고 자랑했다. 문민정부의 임기 종료를 몇달 앞둔 요즘 규제완화는 제자리서 맴돌고 경제는 침체에 허덕이며 한보사태 등 정경유착의 흑막이 잇따라 폭로되는 한국의 현실을 보면서 볼저 총리가 어떤 생각을 가질지 궁금하다.<웰링턴·오클랜드=한상복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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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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