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중국내 反日시위의 역사적 의미

"마치 1919년 일어난 5ㆍ4운동을 보는 것같습니다." 최근 중국 전역에서 일고 있는 중국인들의 반일(反日)시위의 양태를 보면서 상하이(上海)의 한 외교소식통은 11일 `역사적 맥락'을 지적했다. 86년전의 일과 현 사태를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몇가지 면에서 겹치는 측면이있다는 것이다. 우선 이번 반일시위가 자발적인 움직임에서 출발했다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중국 CCTV에 등장하는 시위대의 모습을 보면 하나같이 `전투를 앞둔 결의'를 내비치고있다. 그래서인지 제국주의 세력에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섰던 20세기 초, 구국의봉기에 나선 `민중들의 표정'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비유가 적절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지난 2일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에서 시작된 반일 시위는 순식간에 전국으로 번졌다. 남부 광저우(廣州)로 이어지더니 급기야 지난 9일에는 수도 베이징(北京)에서 2만여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1919년 5월4일 일어난 시위의 물결이 보름여만에 전국으로 확산된 것과 유사점이 적지 않다. 또 베이징 시위는 중국 명문 베이징대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주목됐다. 5ㆍ4운동의 주동세력이 학생들임은 잘 알려진 사실. 당시 학생운동 세력은 5ㆍ4운동을 계기로 전국적 조직체로 성장했다. 게다가 "침략역사 왜곡하는 일본은 반성하라"거나 "제국주의 일본상품 사지말자"는 구호는 바로 86년전 학생 시위대들이 목청을 높였던 것과 맥을 같이 하는 대목이다. 여기에 시기적 유사점도 발견된다. 5ㆍ4운동이 한국에서 일어났던 항일운동인 3ㆍ1만세운동의 직ㆍ간접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의 반일 시위가 벌어지기 전부터 역사교과서 왜곡과 영토분쟁을 일으키는 일본에 대해 중국인들은 "한국의 대응방식에서 배워야한다"는 반응을 보여왔다. 특히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일본의 `반성과 사과'를 촉구하는 대목에서는 신중한 자세로 일관하는 중국 지도부와 대조를 이루면서 중국민의 감정을 자극하는 요인이 됐다는 분석이 많다. 중국인들은 1937년 난징(南京)대학살을 `사건'으로 칭하고 1930년 일본의 중국침략을 `전쟁'이라고 강변하는 일본의 모습을 "더이상 용서할 수 없다"는 분노로 대응하고 있다. 이런 민중적 정서와 달리 중국 정부는 `경협 분리' 원칙을 고수하면서 공식적인 반응외에는 자제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물론 중국 정부의 전략적 판단에 대해 일부세력은 동조하고 있지만 다분히 정서적인 차원에서 반발이 누적돼온 것도 사실. 중국정부는 `민중의 메시지' 전달을 위해 대규모 시위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은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베이징 시위 현장에 경찰병력이 수백명에 불과했다는 점이나 또 일부 시위대는 주중 일본대사 관저 근처에서 일본제로 보이는 차량을 뒤집을 당시 경찰이 시위대를 적극 제지하지 않은 점 등은 이런 측면에서 이해된다. 통상 중국은 사회불안을 야기하는 집회 등에는 수천명의 무장경찰을 배치, 시위자체를 원천 봉쇄해왔다. 결국 최근 시위는 중국 정부의 사실상 `방치' 속에서 진행될 수 있었다는 것이 현지의 평가다. 하지만 중국역사에서 보듯 대규모 봉기가 역사적 변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언제까지 중국 정부가 시위대의 활동을 `묵인 또는 방조'할 지는 불투명하다. 일각에서는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이후 처음으로 대규모 시위가 재현되자최근 빈부격차의 확대나 농촌소외의 심화 등 사회불안 요소를 거론하면서 `시위 성격의 변질'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전망하고 있다. 만일 시위대가 반일 주장에서 한발 나아가 사회적 부조리의 해소를 전면에 내세울 경우 이번 사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될 수 있는 상황이다. 일본정부가 최근 시위사태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며 중국 내 일본인과 주재기업보호를 요청하고 나서자 중국 정부가 시위대의 자제를 요청한 것은 향후 시위양상의 전개와 관련, 관심을 끄는 대목이다. (상하이=연합뉴스) 이우탁 특파원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