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은행원은 괴로워

은행간 실적경쟁에 치여 휴일도 없이 업무 강행군<br>컨테이너출장소서 상담도…최고의 직장 평가는 옛말 "잡역부나 다름없어" 푸념

주택담보대출 유치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용인 동백지구에 설치된 컨테이너박스 은행 출장소. 작은 사진은 컨테이너박스에서 은행원들이 대출상담을 벌이는 모습. /이호재기자

”지난 다섯달 동안에 구두를 네컬례나 갈았습니다. 휴대폰도 두대나 바꿨어요. 저녁 시간은 물론 일요일에도 컨테이너 박스 사무실에 나와 고객을 맞았습니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지난 8일 오전, 경기도 용인 동백지구의 아파트건설단지. 그냥 걷기만 해도 후텁지근한 날씨에 이곳에 국민ㆍ신한ㆍ우리ㆍ하나은행등 이른바 국내 4대은행이 설치한 컨테이너 출장소엔 냉방장치를 틀어놓긴 했어도 사람이 들어오기 싫은 그런 풍경이었다. 1,000 세대가 신규 입주할 이곳 아파트 단지에는 이미 사람이 살고 있는 곳과 곧 이사할 집들이 성냥곽처럼 들어서 있다. 이 곳에서 집단대출 경쟁을 벌이는 은행원들은 이미 나가있는 계약금과 중도금을 기존주택에 주는 주택담보대출로 이관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A은행의 김 모(41) 과장은 지난해말 동백지구 출장소로 발령받은 이후 지금까지 하루도 쉬어본 적이 없다고 고백한다. 그는 경쟁은행을 따돌리고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휴일은 물론 주말도 반납하고 매일 저녁 12시가 넘을 때까지 대출상담 서류와 씨름해왔다. 지점 설립 초기인 올 초에는 매서운 겨울 바람을 맞으며 텐트에서 히터만 하나 켜놓고 상담을 하기도 했다. 요즘은 컨테이너 박스도 설치해 그나마 여건이 좋아졌다. 김 과장은 “동백지구에 발령 받은 이후 5개월 동안 구두는 4켤레 갈아치웠고, 휴대폰은 2대째”라며 “매일 저녁 자정을 넘어서까지 고객의 상담 전화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 덕분에 이 은행은 이 지역의 주택담보대출 전환 수요의 80%를 유치했다. 은행원들은 다른 직장보다 봉급을 많이 받는고 질투어린 외경의 대상이다. 하지만 요즘 은행원 스스로는 잡역부나 다름없다고 푸념을 한다. 동백지구 컨테이너 박스의 행원은 그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재개발이나 신규 분양지역의 집단대출이 이뤄지는 곳에서는 어깨에 띠를 두르고 임시 천막을 친 채 대출 세일에 나선 은행원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됐다. 이른바 은행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은행원들은 요즘 상시적인 실적경쟁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정해진 퇴근시간보다 평균 두어시간 더 일하는 것은 기본, 지점이나 본점 직원도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주말은 반납하는게 마음이 편한 실정이다. 영업에 각종 연수 및 교육에 요즘 은행원들에게 ‘칼 퇴근’이란 말은 남의 나라 얘기처럼 들린다. 그저 시키니까 하는 일하기보다는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일해야 하니까 더욱 어깨 무거운 무게를 느끼는 것이 요즘의 은행원들이다. 외환 위기 이후 은행원들은 다른 업종에 비해 좋게 말하면 구조조정, 현실적으로는 인력감축의 회오리 바람을 당했다. 40대중반이면 직장을 떠나야 한다는 이른바 ‘사오정’도 은행에서 나온 예가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전체 은행원(임원급 및 비정규직원 제외)의 숫자는 외환위기 이전인 97년 말 10만6,458명에 이르던 것이 2004년 말 현재 8만8,415명으로 20% 이상 줄었다. 하지만 요즘 은행원들은 사람이 준 대신에 업무는 예전 보다 크게 늘어나 일을 더 해야 한다. 사실상 슈퍼맨처럼 일해야 한다는 푸념도 나온다. B은행 본점 부서에 근무중인 김 모(35) 대리는 “한명이 두 세가지 일을 하는 것은 기본”이라며 “업무시간에 일을 다 못 끝내 평일에는 야근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토요일에 사무실에 출근해서 마무리한다”고 말했다. 몇 년전보다 두배로 2배로 많아진 업무를 절반의 인원으로 해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종 회의 및 교육 드응로 빈 동료들의 서류정리도 주말에 해야 할 일이다. 입사한지 10년 이상 되는 과장, 차장급 이상 직원들은 누구보다도 빨리 출근한다. 은행 일선지점의 개점 시간은 9시30분. 하지만 매일 오전 회의, 서비스 교육 등이 예정되어 있어 정해진 시간 이전에 출근하지 않으면 업무에 지장이 온다. 게다가 바쁜 하루 일과를 마치면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사내 연수에 참여하거나 개인적인 영업활동 시작해야 한다. 입사 당시에는 전혀 생각도 못했던 일이다. 주말 마다 해야 하는 연수는 자기발전은커녕 업무시간을 연장할 뿐이다. C은행 본점에 근무중인 최 모(38) 과장은 오는 8월말까지 4달 과정의 ‘책임자 MBA’과정을 이수하고 있다. 그는 “사실상 주 6일 근무를 하고 있다”며 “출석을 전제로 리포트를 제출하고 중간 시험을 치르고, 점수가 일정수준 이하일 경우 교육비를 반납하는 조건이라 게을리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나마 몸으로 때우는 것은 편하다. 실적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다. D은행의 한 지점장은 “본점에서 실적을 요구할 때면 마른 수건이라도 쥐어 짜야 하는 심정”이라며 “지점 실적 경쟁에서 밀리면 다음 인사에서 후선 업무로 밀린다는 생각에서 무리해서라도 경쟁에 매달릴 수 밖에 없다”고 털어놓았다. 요즘 지점장들은 과거와 달리 관리자형에서 세일즈맨 형으로 거듭나야 한다. 부하 직원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기 때문에 누구 보다 일찍 출근해서 섭외에 나서야 한다.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개인 시간이나 건강 등 상당 부분을 포기하기도 한다. E은행 지점에서 VIP창구를 담당하고 있는 이모 과장(39ㆍ여)은 외부로 고객을 만나러 갈 때면 직접 만든 음식과 편지를 준비한다. 고객을 거래하는 고객들은 예금은 물론 펀드나 보험 등 대부분의 금융상품에 가입한 상태. 따라서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정성이 담긴 선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다. 이 과장은 “영업시간은 업무를 보고 대부분 영업 외 시간에 따로 시간을 내서 준비하고 있다”며 “한 번은 일 욕심에 무리를 하다 쓰러진 적도 있다”고 소개했다. 대다수 은행원들이 원하는 본부 근무도 마냥 호락호락하지 않다. 거의 매일 저녁 본점 구내식당이 직원들로 붐 비는 것도 야근자가 많기 때문이다. A은행 여신심사 팀은 대출심사가 크게 늘어나며 평일 저녁 야근은 물론 주말에도 출근해 지점에서 신청한 여신을 심사하고 있다. 영업점에서 신청한 여신에 대해 하루라도 빨리 가부를 결정해주어야 타 은행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은행 여신담당 업무 직원들에게 야근은 일상이며 주말은 사실상 없는 게 현실이다. 시중은행 노조의 한 관계자는 “은행원의 근무여건이 갈수록 빡빡해지는 것은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단기 실적주의가 성행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이익을 높이기 위해 인원 등 비용은 가급적 줄이고, 직원들을 쥐어짜는 실적 위주의 경영을 하게 된 결과와 무관치 않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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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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