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토요산책] 일연선사 탄신 800주년

경북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화산 서쪽 산자락의 인각사는 일연선사(一然禪師)가 만년에 ‘삼국유사’를 집필하며 입적할 때까지 주석하던 역사의 현장이다. 인각사 일주문 앞에는 지난 85년에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에서 세운 일연선사 시비(詩碑)가 있다. 전면에는 ‘삼국유사’에 실린 일연선사의 시 앞부분이 새겨져 있다. ― 즐겁던 한 시절 자취 없이 가버리고 시름에 묻힌 몸이 덧없이 늙었어라 한 끼 밥 짓는 동안 더 기다려 무엇하리 인간사 꿈결인 줄 내 이제 알았노라. ― 비석에는 없지만 이 시의 뒷부분은 다음과 같다. ― 착한 행실 위해서는 마음을 먼저 닦을지니 미인을 그리는 꿈 해로운 꿈일러라 가을날 맑은 밤에 무슨 꿈을 꿀거나 때때로 눈감고 청량에 이르리. ― 일연선사는 ‘삼국유사’에서 이 시를 지은 까닭을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 세상의 낙이라는 것은 즐겁기도 하고 괴롭기도 한 것이건만 많은 사람이 이런 이치를 깨닫지 못하기에 노래를 지어 경계코자 함이다.’ 인각사 일연선사부도가 서 있던 본래의 자리는 세수 70이 넘은 일연선사가 90이 넘은 노모를 모시고 만년을 보내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장사 지낸 묘소 바로 앞이었다. 오랜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마멸된 선사의 부도탑을 올해 일연선사 탄생 800주년을 맞아 복원한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삼국유사’는 단순한 역사책이 아니다. ‘삼국유사’는 그보다 140년 전에 유학자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이른바 정사(正史)라는 미명 아래 고의적으로 빼먹은 단군왕검(檀君王儉)의 고조선 개국신화를 비롯하여 가야ㆍ신라ㆍ고구려ㆍ백제 등 여러 나라의 건국 신화, 민간신앙의 설화와 향가, 고승들의 전기와 불법을 통한 신비로운 교화(敎化)의 이야기 등을 빠짐없이 담은 민족사적ㆍ불교사적으로 더없이 소중한 문화 유산이다. 5권 9편으로 이뤄진 ‘삼국유사’는 일연선사가 80평생을 두고 이 땅의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보고 들은 기록을 종합한 실증주의적 답사문학의 걸작이기도 하며 안으로는 무신정권의 전횡과 밖으로는 몽골족의 침범이라는 내우외환의 수난기에 자주적 역사관과 주체의식을 결집한 민족사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일연선사는 유학자도 아니고 벼슬아치도 아니고 사학자도 아닌 승려의 신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사 기술의 방식에서 우리나라 임금을 천자(天子)나 천제(天帝)로, 임금의 죽음을 훙(薨)이 아닌 붕(崩)으로 표현한 사실만 보더라도 그의 역사관이 얼마나 투철한 주체의식을 지녔던가를 잘 알 수 있다. 이는 일연선사가 유불(儒彿)이나 승속(僧俗)의 경계를 떠나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이 매우 깊고 굳세었던 겨레의 스승이었음을 잘 일러준다고 하겠다. 물론 일연선사가 세상에 살아 있을 때에는 ‘민족’이란 말도, 민족의 개념도 정립된 것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한민족(韓民族)이란 유대감을 떠나서 어찌 우리나라와 선조의 역사에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근래 민족의 개념에 관해 의견이 분분하다.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세상이 바뀌었으니 우리 한국인도 이제는 단일민족이란 개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단군할아버지의 핏줄을 받은 순혈적(純血的) 단일민족이 아니라 미국이나 중국처럼 혼혈적 복합민족이란 것이다. 우리에게는 오래 전부터 중국인ㆍ일본인ㆍ몽골인ㆍ여진인 등의 피가 오랫동안 꾸준히 유입돼왔으며 현대에 들어서서는 백인ㆍ흑인, 그리고 동남아 각국 사람들의 핏줄까지 섞였으니 이제 더는 한 핏줄이니 단일민족이니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런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우리가 쉽사리 민족정신을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칫 잘못하면 한민족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잃어버릴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중국이 한나라나 송나라나 명나라와 같은 한족(漢族)만의 역사가 아닌 몽골족의 원나라, 거란족의 요나라, 만주족의 금나라와 청나라, 그리고 티베트의 역사에 이어 발해사ㆍ고구려사ㆍ고조선사까지 빼앗아가려는 것은 한족만의 역사가 별 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중화사상에 의한 세계패권주의의 저의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민족정신을 잃으면 역사도 빼앗기게 된다. 자주적이며 주체적인 역사관을 지녔던 민족의 스승 일연선사 탄생 800주년을 맞아 민족사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가슴 깊이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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