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공주 수촌리 백제고분

최근 발굴된 충남 공주시 의당면 수촌리 소재 고분에서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환두대도 등이 출토돼 사학계는 물론 일반인 사이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는 지난 71년 무령왕릉 발굴 이후 최대 규모의 백제유적 발굴이라고 한다. 학자들은 이 고분의 축조시기를 5세기 초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하기 이전에 이 지역에 이미 백제의 왕족, 또는 그에 버금가는 강력한 지배세력이 있었다는 뜻이다. 백제는 문주왕 원년(475)에 웅진으로 천도해 성왕 16년(538)에 사비성(부여)으로 천도할 때까지 4대 64년간 이곳에 도읍했다. 이번 발굴에서 출토된 유물로 보아 이들 고분은 왕릉급으로 추정된다. 무령왕릉의 경우 등에서도 봤지만 금동관모와 금동신발은 국왕 또는 왕비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환두대도 역시 대체로 군사 최고 통수권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보검이다. 따라서 백제의 웅진 천도 이전에 이 지역이 왜와 비슷한 분국(分國) 형태로 백제의 통치를 받았으리라는 것이 필자의 추측이다. 그렇지 않다면 백제가 왕족을 파견해 통치했던 지방조직인 22개 담로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재야사학자 김성호씨가 오래전에 이런 의문을 표시한 바 있다. 백제의 웅진시대가 사비시대 123년에 비하면 절반 정도였음에도 이 지역에 산재한 왕릉으로 추정되는 10여기를 비롯해 지배층의 것으로 추정되는 수백기의 고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으냐고 했다. 그의 주장은 백제가 건국 초기부터 비류왕의 백제와 그의 아우인 온조왕의 백제로 분립해 온조는 한성, 비류는 웅진에서 각각 사직을 유지하다가 개로왕 21년(475)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되자 온조백제가 웅진으로 남천하고 비류백제는 왜로 건너갔다는 것이다. 우리 고대사는 미궁처럼 복잡하다. 특히 신라와 고구려에 비해 기록과 유적ㆍ유물이 턱없이 부족한 백제사의 경우는 더하다. 이번 발굴을 계기로 백제사 연구에 보다 많은 성과가 있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중국이 고구려와 발해사 등 우리 역사를 탈취하려는 시점에 우리 고대사에 대한 보다 깊은 애정과 관심을 기울일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황원갑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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