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CEO 삶 그리고…] 박경수 피에스케이 사장

반도체 장비 국산화 성공…세계2위 '애셔' 업체 일궈<BR>日 업체와 합작사 설립 96년 첫 독자제품 개발<BR>IMF때 감원하면서도 연구는 계속 "도약 발판"



300mm 애셔 장비(수프라3)

[CEO 삶 그리고…] 박경수 피에스케이 사장 반도체 장비 국산화 성공…세계2위 '애셔' 업체 일궈日 업체와 합작사 설립 96년 첫 독자제품 개발IMF때 감원하면서도 연구는 계속 "도약 발판" 평택=이상훈 기자 shlee@sed.co.kr 300mm 애셔 장비(수프라3) 관련기사 • 피에스케이 올 사업전망 반도체 장비업체인 피에스케이의 박경수(54ㆍ사진) 사장은 ‘뚝심있는 오너’로 통한다. ‘보스’ 기질이 묻어나는 외모는 물론이거니와 반도체 관련 무역업에서 시작해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한 반도체장비 사업을 일궈낸 점도 그렇다. 피에스케이는 미국 맷슨(Mattson)사에 이은 세계 2위 애셔업체로 지난해 매출 637억원(잠정)을 올렸다. 애셔는 감광제를 제거하는 애싱(Ashing)공정에 필요한 장비. 박 사장이 반도체장비 분야에 눈을 뜨게 된 것은 미국에서 경영학 석사를 마치고 동부그룹의 뉴욕지사에서 5년간 일하면서부터. 건설ㆍ엔지니어링쪽 일을 하면서 미래 산업으로 각광받던 반도체장비 분야에 뛰어들 결심을 굳힌 그는 국내로 들어와 85년 피에스케이의 전신 격인 금영이란 회사를 설립했다. 주로 유틸리티 설비와 장비 관련 무역업을 하면서 기술축적과 함께 관련 네트워크를 키워 나갔다. 금영은 5년 뒤인 90년 일본의 프라즈마시스템, 일본산소 등 2개 업체와 각각 절반씩 지분을 출자해 합작회사 피에스케이를 세웠다. 당시 프라즈마시스템은 애셔 제조업체로서 한국 시장에 제품을 팔기 위해 금영과 손잡았던 만큼 기술 전수에 미온적이었다. 박 사장은 “현재는 일본측 지분이 전혀 없지만, 그 당시만 해도 일본 입김이 셌다”며 “회사를 키우려면 독자 기술이 필수적이었던 만큼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기술 전수에 시큰둥하던 일본 연구진들로부터 기술을 하나 둘 배워나가면서도 국내 대학과는 산학합동으로 연구에 매진했다. 그 결과 96년 200㎜ 애셔의 국산화에 성공, 삼성전자ㆍLG반도체 등 국내 기업들의 호평을 끌어냈다. 박 사장은 “일본과 미국에서 전부 수입하던 장비를 우리 손으로 만든 것이라 연구진의 자부심은 대단했다”며 그 때 일을 떠올렸다. 하지만 박 사장에게도 위기가 찾아 왔다. IMF 외환위기로 고객인 반도체업체들이 경영난에 직면, 제품 구매를 사실상 중단한 것. 할 수 없이 직원을 줄이는 등 구조조정에 나섰다. 하지만 연구만은 결코 중단하지 않았다. 북한산 등 서울 인근 산을 오르며 정신적 고통을 이겨 나갔다. 다행히 97년 코스닥시장에 상장되면서 20억원의 공모자금 20억원을 확보했다. 또 200㎜ 애셔시장이 성숙되면서 매출이 본격적으로 발생해 외국 기관으로부터 70억원을 투자유치했다. 반도체시장이 최악이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개발한 300㎜ 애셔를 2001년 시장에 내놓아 도약의 발판도 마련했다. 박 사장은 “불황일수록 기술 개발에 매달렸다. 반도체장비 국산화라는 열정과 어려움에 굴하지 않는 도전정신이 없었다면 지금쯤 소규모 장비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었을 것”이라며 웃었다. 그는 “반도체장비 사업은 경쟁에서 뒤쳐지면 바로 도태하는 만큼 죽기살기로 뛰어야 한다”며 “아직까지 반도체장비의 국산화율이 10~15%에 불과한 만큼 더욱 분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사장은 경쟁을 통해 얻은 것들을 조금씩 사회에 되돌려주려 노력한다. 그래서 직원들과 함께 매달 한번씩 무의탁 장애 노인시설을 찾아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입력시간 : 2006/02/05 16:53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