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4월8일] 워커힐 호텔 개관

1970년대 고도경제성장기를 겪은 세대에게는 ‘동양 최대규모’라는 수식어가 낯설지 않다. 당시 새로 올라가는 건물이나 다리에는 으레 동양 최대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었고 우리는 거기서 이유도 모르는 자부심을 느끼곤 했다. 5ㆍ16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1961년 그해 7월,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달러벌이를 명분으로 동양 최대 규모의 관광단지인 워커힐 건설을 추진한다. 김종필은 사단법인 워커힐을 설립한 뒤 건립부지로 한강 백사장이 내려다 보이는 광장동 광나루 일대 18만여평을 사들였다. 그 땅은 당시 설모라는 부자가 소실에게 준 땅으로 김종필은 국가사업을 이유로 헐값에 매수했다. 군인들이 주축이 돼 추진한 워커힐은 건축과정에서 각종 비리와 무리가 끊이지 않았다. 값비싼 수입자재 통관에 중앙정보부가 동원되고 공사대금은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인 양 횡령과 착복이 다반사였다. 필요한 노동력은 죄수들을 무상 동원했으며 부족한 장비는 군에서 공급했다. 권력의 제2인자가 밀어붙인 워커힐 공사는 거칠 것이 없었다. 1963년 4월8일 드디어 한국 최초로 현대적인 감각을 갖춘 워커힐호텔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지 14만6,000평에 지하 3층, 지상 17층 본관을 비롯해 카지노ㆍ전문음식점 등 각종 편의시설을 갖추고 개관한 것. 그러나 워커힐 건축과정에서 발생한 횡령과 비리는 그 수법이 너무나 치졸하고 대담해 국민 여론이 그냥 넘길 수 없을 지경이었다. 결국 1963년 말 김종필은 워커힐호텔 사건을 포함한 4대 의혹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정계를 은퇴, ‘자의반 타의반’ 외유길에 오른다.. 워커힐은 개관 후 관광공사로 넘어갔다가 1973년 선경개발㈜이 인수, SK그룹 산하의 계열사가 됐다. /박민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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