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그레이트 체인지 코리아] 시장경제·성숙한 시민의식이 '80년대 성장 드라마'의 원천

2부. 고성장 신화 이끈 '5대 정신' ③ 역동의 정신…다이내믹 코리아<br>정부서 과감히 규제 풀자 기업은 적극 투자로 화답<br>88 올림픽 성공 개최로 세계속 한국 위상 높아져… 국민 자긍심도 최고조에



1987년 7월 9일 거행된 이한열군의 장례식에는 서울 신촌로타리~시청앞광장의 연도에 100만 애도 인파를 비롯, 전국에서 150만여명의 애도인파가 몰려 제5공화국 출범 이래 최대인파를 기록했다. /서울경제DB

한국은 1980년대 들어 정부주도의 경제체제에서 시장중심 경제로 전환하면서 급격한 경제성장을이 뤘다. 특히 지난 1988년열린 서울올림픽은 경제성장및사회^문화 발전에 있어서 도약대 역할을했다. 서울올림픽 마스코트였던‘호돌이’가올림픽 당시 잠실 주경기장을 행진하는 모습. /서울경제DB

지난 1980년대는 한국경제가 정부주도의 계획 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대변혁기였다. 이때 시장중심의 제도가 정비되기 시작했으며 민주화 운동으로 시민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1987년 민주항쟁을 통해 형성된 시민적 자아는 올림픽의 개최 성공과 눈부신 경제성장을 밑거름으로 더욱 성장하며 훗날 역동적 한국사회, 즉 '다이내믹 코리아'를 빚어내는 원동력이 된다. 시민들의 열정과 참여의식은 1990년 국가 부도 위기의 극복, 2002년 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한 맹아(盲兒)가 됐다. 특히 1988년 서울올림픽은 한국이 세계 무대에 긍정적인 존재감을 알리고 스스로도 자긍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 ◇시장경제 싹튼 1980년대 초=1980년대는 정부주도 경제운용에서 시장 중심 경제로, 산업 보호에서 수입개방과 경쟁촉진으로 경제정책의 큰 틀이 바뀐 시기였다. 1960~1970년대 정부 주도하에 성장해왔던 한국경제는 1979년 2차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암초에 부딪혔다. 두자릿수 이상의 고통스런 인플레가 지속됐으며 1980년에는 급기야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정부는 이에 규제 완화와 시장개방을 통해 민간 주도형 경제로 이행하기 시작한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실장은 "정부 규모가 커지다 보면 정부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며 "민간 자생력을 동력으로 한국경제가 효율적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한 시기가 1980년대"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과감하게 규제를 풀자 기업과 가계는 적극적인 투자와 소비에 나섰다. 조선, 정보기술(IT), 자동차 등 오늘날의 한국을 먹여 살리고 있는 주요 산업에 대한 대기업들의 집중적인 설비 투자가 1980년대 이뤄졌다. 동시에 시장경제의 기반이 되는 법과 제도들도 정비되기 시작했다. 공정한 경쟁을 촉진하기 위해 1980년 공정거래법이 만들어졌으며 1982년에는 장영자 어음사기사건으로 금융실명제 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1988년부터는 10인 이상 사업장 대상으로 국민연금제도가 실시됐다. ◇민주화 운동으로 싹튼 시민적 자아=1980년대는 광주민주화 항쟁으로 암울하게 시작됐다. 그러나 이때 눌렸던 시민적 에너지는 1980년대 중반 경제성장을 발판으로 성숙되면서 1987년 6월 민주항쟁에서 꽃피게 된다. 정부는 '6ㆍ29 민주화 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단행하고 언론 자유 보장을 약속한다. 이 같은 민주화 열기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지며 전국에서 노동조합이 봇물 터지듯 결성된다. 경제성장에 따른 분배 요구가 커지며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 인상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이 같은 변화는 임금 인상으로 국가 경쟁력이 하락하고 사회 분열을 초래했다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그러나 소득수준의 향상은 내수 시장 확대의 기반이 됐으며 개발도상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국민적 자신감의 근거가 됐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장채철 시티글로벌마켓증권 이코노미스트는 "1987년 노동운동의 활성화로 억압돼왔던 임금이 상승하면서 내수가 경제 성장에 기여하는 바가 커졌다"며 "대량생산 대량소비, 즉 포디즘이 한국 경제에서 자리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민주화 운동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확보하고 이를 기반으로 투명하고 민주적인 정치체제 확립의 발판을 갖추게 된다. ◇소비 주체로 전면에 부각한 국민=1980년대에는 국민이 소비의 주체로서 전면에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전만 해도 정부가 소비를 억제하고 저축률을 높이기 위해 '소비=사치'라는 인식을 주입하며 소비를 억제해왔다. 그러나 높아진 임금수준, 민간주도 경제가 발달하면서 TVㆍ컴퓨터ㆍ자동차를 가정에서 소유하게 됐다. 마이카 시대가 열린 것도 1980년대다. 1980년 18만대도 미치지 못했던 자가용 승용차가 1990년에는 10배 이상 증가한 190만대를 기록했다. 야간통행금지와 해외여행 제한 등의 규제 해제는 국민생활의 변화를 가져왔다. 1982년 야간통행금지해제로 밤 문화를 즐길 수 있게 됐고 억압된 분위기에서 해방됐다. 해외여행 자유화로 한국민이 '우물안 개구리'에서 벗어나 외부 세계에 눈뜨기 시작했다. ◇올림픽 개최로 경제발전ㆍ시민의식 절정=1988년 올림픽을 전후해 한국경제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만큼 경제성장을 이룬다. 1986~1988년 3년간 한국경제는 10%가 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으며 3% 미만의 물가안정을 기록했다. 연 100억달러를 웃도는 국제수지 흑자를 달성했다. 이는 '저유가, 저금리, 저달러'라는 3저 현상이 밑바탕이 됐다. 여기에 1980년대 초부터 경제개방 속에 기업의 공격적인 투자와 경쟁ㆍ혁신 등이 지속된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윤종원 기획재정부 경제정책국장은 "대외 여건은 때에 따라 좋기도, 나쁘기도 하기 때문에 경제성장의 충분조건은 아니다"라며 "우리나라는 우수한 인적자원, 거시경제의 안정, 경제사회 전반의 인프라 등 3박자가 갖춰졌기 때문에 드라마틱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사회·경제 한단계 도약 이끈 촉매제
88 서울올림픽-2002 한·일 월드컵
메가 스포츠 이벤트는 스포츠 행사를 뛰어넘어 한 나라의 사회 경제적 지형을 바꿔 놓기도 한다. 메가 이벤트 효과는 선진국보다는 개발도상국일수록 극대화된다. 지난 1988년 서울올림픽과 2002년 한일월드컵은 사회 변화의 촉매제가 된 대표적인 메가 이벤트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1980년대 경제 발전과 맞물리면서 그 효과가 배가 됐다. 당시 올림픽 모토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가 상징하듯 서울올림픽은 한국에는 대외 개방의 촉매제 역할을 한 동시에 세계 속에 한국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실제로 올림픽 이후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이 달라졌다. 특히 서울올림픽을 전후해 불었던 냉전 화해 무드는 우리나라가 활발한 동유럽 외교를 펼치는 데 기반이 됐다. 경제효과도 컸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올림픽의 총 생산유발효과는 4조7,504억원, 고용효과는 33만6,000명, 외화수입은 5억2,100만달러, 국제수지 개선효과 4억3,400만달러 등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무엇보다 귀중한 결과는 국민들의 민족적 자긍심 고취, 자신감 등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무형의 효과다. 홍순영 삼성경제연구소 전무는 "올림픽 개최 이후 사회 색깔이 바뀐 것 같았다. 이전이 무채색이었다면 이후는 유채색이었다. 문화도 개방적으로 바뀌었으며 다소 수동적인 분위기에서 적극적이고 환해졌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로 심어졌던 국제무대에서의 자신감은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절정을 이뤘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굳어졌던 한국의 이미지가 역동적이고 활기찬 '다이내믹 코리아'로 바뀌었다. 특히 붉은 악마를 중심으로 벌어진 국민들의 자발적인 거리응원 문화가 전세계적인 전파를 타면서 한국의 이미지는 외환위기 국가에서 젊고 역동적인 국가로 전세계인의 뇌리에 자리했다. 월드컵 이후에는 우리나라 스포츠 선수들이 세계로 뻗어가면서 이를 활용하는 기업들의 글로벌 마케팅도 가속화된다. 특히 삼성이 영국 프리미어리그팀 첼시를, 현대차는 3년 연속 월드컵을 공식 후원하면서 국내 대기업이 전세계 소비자들에게 글로벌 기업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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