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 5월 6일] <1689> 스피넘랜드법


'성인 남자라면 일주일에 빵 12㎏에 해당하는 임금이 필요하다. 임금이 이보다 낮다면 부족분만큼의 보조금을 지급한다.' 1795년 5월6일, 영국 남부 버크셔 지방 판사들이 정한 지역 내 공공 부조(扶助) 방안의 골자다. 빈민들은 이를 반겼다. 본인은 물론 부인과 아이들을 포함한 최저 생계비를 교구나 지방에서 보장해줬으니까. 무직자와 저임금 노동자에게도 혜택이 돌아간 이 제도의 이름은 '스피넘랜드(Speenhamland) 시스템'. 지역 판사들이 모인 지역의 이름을 땄다. 사회복지학에서도 근대적 생존권 도입으로 간주할 만큼 온정적인 이 시스템을 도입한 주역들은 지주계층. 이주를 제한했던 '정주법(Settlement Act)'의 부분폐지로 인력을 공단에 빼앗기게 될 처지였던 지주들은 임금 보조라는 고육책을 짜냈다. 순식간에 전국으로 확산되며 '스피넘랜드법'으로 불린 이 시스템은 기대와 달리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고용주들이 보조금을 의식해 임금을 낮춘 결과 노동의욕과 생산성이 낮아졌다. 세부담이 높아진 사람들은 일도 하고 세금도 내느니 극빈층을 자처해 구호 대상으로 떨어졌다. 국가의 빈민구제 예산은 1795년 200만파운드에서 1831년 700만파운드로 뛰었다. 스피넘랜드법은 1833년 신빈민법 제정으로 사라졌지만 무수한 흔적을 남겼다. 시장논리를 중시하는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뿌리를 내린 것도 스피넘랜드 논쟁을 통해서다. 이 법은 아직도 연구과제다. 연이은 흉작과 프랑스 대혁명에 따른 빈민들의 동요를 이 법으로 막았다는 사학계의 해석도 있다.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할 제3의 대안으로도 주목 받는 폴 칼라니는 이 법을 비중 있게 다뤘다. 법 자체도 문제였지만 시장의 효율성에 대한 맹신을 낳은 계기가 스피넘랜드법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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