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미국은 몰락하고, 영국은 독재 제국이 된다. 철권통치자 아래 영국은 2차대전 후 독일보다 더한 야만국이 된다. 통행금지가 있고, 책과 방송은 사전검열에 지배당한다. 피부색과 성적, 종교적 성향이 다른 이들은 ‘정신집중 캠프’로 끌려가 사라진다. 그런 나라에 사는 소녀 이비(나탈리 포트만)는 정권의 하수인들에게 농락당할 뻔 하다가 이상한 마스크를 쓴 사내에게 구조된다. 그의 이름은 ‘V’(휴고 위빙).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읊조리고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읽는 그 사내는 영국민을 상대로 잃어버린 자유를 역설하고는 폭력과 압제에 맞서 세상을 구할 혁명을 계획한다. 이비는 점점 자신에 관한 진실을 깨달아가며 V의 혁명에 동참하게 된다. 17일 국내를 포함해 전세계 동시 개봉하는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영국의 현실적 공간에서 가상세계를 창조해 낸 조금은 독특한 영화다. ‘매트릭스’ 시리즈를 만든 워쇼스키 형제가 제작ㆍ각본을 맡은 이 영화는 ‘매트릭스’가 보여준 가상세계에 대한 워쇼스키의 또 다른 상상력이 엿보인다. 물론 ‘매트릭스’만큼의 메시지는 효과적으로 전달하진 못하지만 말이다. 영화는 81년 영국의 월간 만화잡지 ‘워리어’를 통해 첫 선을 보인 만화를 원작으로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V가 쓴 가면은 영국의 전설적 인물 가이 포크스의 가면. 1605년 영국 제임스 1세 독재에 항거하기 위해 런던 국회의사당을 폭파하려다 체포되 처형됐단 전설적 인물이다. ‘브이 포 벤데타’는 분명 인간의 삶과 자유에의 확실한 메시지를 전한다. 영화를 통과하는 블루블랙톤 영상은 우리에게 실제 닥칠지도 모르는 우울한 미래를 연상시킨다. 선과 악, 인간의 존엄성,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 등 다소 무거운 주제들을 그리 어렵지 않은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성찰시킨다. 다만 묵직한 메시지에 비해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분위기나 이야기 흐름은 다소 가볍다. V가 끝없이 되 뇌이는 현란한 수사에 비해 정작 주인공들이 펼치는 혁명은 대단히 정치적이면서도, 한편으론 순진하다. 역시 가장 눈에 띄는 건 주연 배우들의 화려한 연기. 삭발까지 감행한 나탈리 포트만은 이제 할리우드에서 가장 강렬하고도 눈에 띄는 연기로 그만의 세계를 일궈냈다. ‘매트릭스’에서 네오를 끈질기게 괴롭히던 스미스 요원이었던 휴고 위빙은 마스크를 쓴 채, 한 점 표정 없이도 목소리와 몸짓만으로 살아있는 캐릭터를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