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베이징의 홍차오(紅橋) 시장. ‘핵무기 빼고 모든 걸 다 살 수 있는 곳’이다. 지난 6일 베이징의 수은주가 영하 10도 아래로 뚝 떨어지면서 거리는 한산했지만 이곳은 물건 값을 흥정하는 사람들의 열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펑요우, 우스콰이(손님, 50위안입니다)”라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발걸음을 잡는다. 뒤를 돌아보니 한 스무살이나 됐을까. 앳된 얼굴의 전자제품 상점 여성 점원이 라디오 겸용 휴대용 카세트플레이어를 손에 들고 소리를 치고 있었다. 50위안이라면 우리 돈으로 7,000원에 불과하다. 이종성 대한상공회의소 중국 TFT 팀장은 “중국의 중관춘에 가면 디지털카메라를 우리 돈으로 2만원이면 살 수 있다”며 “이제 우리 기업은 한 단계 높은 고품질ㆍ프리미엄 제품에서 살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한국산 제품의 5분의1, 10분의1 가격으로 무장한 중국 공산품들이 한국시장에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는 데 있다. 이미 국내 유통시장에서 국내 제품의 ‘씨’가 말라가고 됐다. 우리 시장에서 우리 제품이 설 자리를 잃고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중국제품 한국시장 ‘싹쓸이’=신세계 이마트, 롯데마트 등 할인점들은 최근 중국산 제품 수입을 크게 늘리고 있다. 신세계는 중국 직매입을 강화하기 위해 지난해 사내에 해외소싱(sourcing)팀을 신설하고 중국산 제품을 지속적으로 늘릴 계획이다. 홈플러스도 지난해 중국산 제품 직매입을 전년 대비 230% 늘렸고 롯데마트ㆍ한국까르푸 등도 중국산 제품의 비중을 확대하고 있다. 중국제품의 범람은 소비재를 넘어 가전ㆍ철강ㆍ자동차 분야에까지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중국산 가전제품들은 국내 시장에서 서서히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다. 중국 가전업계 1위인 하이얼은 지난해 초부터 ‘초저가’를 무기로 한국시장 공략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하이얼은 와인냉장고 판매에서 현재 국내 시장점유율 1위에 올라있으며 에어컨도 지난 여름 3만대나 팔았을 정도로 판로를 급속하게 확장하고 있다. 또 지난해 32인치 LCD TV를 출시하면서 초저가 전략과 아울러 중ㆍ고가 제품전략을 병행할 의지를 내비쳤다. 지난해 미국 IBM의 PC사업 부문을 인수한 중국 레노버도 지난해 한국시장에 모니터인 ‘씽크비전’과 ‘씽크패드’ 브랜드의 태블릿PC를 선보였고 레인콤의 ‘아이리버’를 외주 생산하던 중국 AVC사 역시 한국시장에 자사 브랜드 제품을 출시하고 본격적인 시장공략에 나섰다. 중국산의 ‘무풍지대’였던 국내 자동차시장도 이제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대우자동차판매가 중국의 칭링자동차와 소형 트럭 수입을 추진, 성사될 경우 국산 트럭보다 20% 가량 싼 중국산 트럭이 국내 시장에 상륙하게 된다. 중국 길리자동차의 지주회사인 길리홀딩그룹도 중국산 승용차를 한국에 수출하기 위해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위기’는 ‘기회’=중국은 원자재 공급국에서 고부가가치 수출국가로 탈바꿈했다. 중국해관(세관) 통계에 따르면 92년 우리나라의 대중국 수입에서 광산물 화공품 등 원자재 비중은 무려 76.4%. 그러나 원자재 수입규모는 지난해 40.2%로 급감한 반면 정보통신기기ㆍ전자부품ㆍ기계류 등 자본재 수입비중은 3.8%에서 29.1%로 크게 확대됐다. 특히 전기전자제품의 경우 수입이 10년 새 32배나 폭증해 대중국 의존도가 92년 1%에서 2001년에는 11.4%로 높아졌다. 이성환 전국경제인연합회 베이징사무소 소장은 “저가 공산품에 있어서는 국내 기업들이 중국과 경쟁해서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며 “중국 기업과 차별화된 생존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산의 범람을 지나치게 우려하기보다는 오히려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는 것. 우선 중국산 저가 공산품들이 물가를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고 기업들의 생산비용을 덜어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특히 산업 구조조정을 통한 경쟁력 강화의 발판이 될 수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한 관계자는 “저기술 분야에서 중국 제품의 수입증가로 비교우위를 상실한 제조업 부문들이 고통스럽지만 자연스럽게 구조조정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다”며 “정부와 민간은 가용 자원을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집중해 새로운 동력을 육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