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 금융

회개와 용서

예수는 베드로가 새벽닭이 울기 전에 자기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예수의 그런 말을 듣고 절대로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예수의 예언은 그대로 맞아 떨어졌고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는 죄책감에 눈물을 흘렸다.필자가 이말을 한 것은 예수가 베드로를 용서해서 열두 제자들 중 으뜸으로 세웠기 때문에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인 것이다. 만약 예수가 베드로를 용서하지 않고 『네가 나를 3번이나 부인하고도 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느냐, 이제부터 너와 나는 결별이다.』 이렇게 선언했다면 기독교는 보복하는 종교가 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으면 세계적인 종교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는 일곱 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했다. 그러니 베드로가 세 번 예수를 부인한 것은 그렇게 큰 죄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단한번의 실수로도 인간관계가 파탄이 오고 돌이킬 수 없는 또다른 양심의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대인관계에서 한번 비위가 틀리면 쳐다보기도 싫을 때도 있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또다른 인간예수의 모습에 우리는 한 인간의 번민과 고뇌를 엿볼 수 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 전에 산에 올라가서 제자들과 함께 기도를 했다. 한참 기도 하다가 제자들을 둘러보니 제자들이 자고 있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나는 마음이 산란해서 기도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깨어서 기도하지 않고 자고 있느냐, 어서 함께 기도하자.』 예수는 자기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마음이 산란하고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죽으면 예수가 죽는것이지 자신들이 죽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죽음을 앞에 두고 잠잘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인간예수의 심정이 어떠했었겠는가. 목숨을 걸고 예수를 따르겠다고 다짐했던 제자들이 예수의 죽음앞에서 보여준 잠자는 모습이 바로 평범한 우리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사람은 주종관계나 상하관계에서 의리나 충성 그리고 변할 수 없는 사랑의 맹세를 한다. 그러나 그 맹세가 깨어졌을 때 배신이라는 말을 한다. 그때의 배신은 일방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쌍방이 공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이 되는 것이다. 자기의 죽음앞에서 제자들이 잠자는 모습을 보고도 인간예수는 제자들을 용서했고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용서받은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예수교를 전파한 것도 예수의 용서에 대한 보답이었다. 진정한 회개와 용서는 새로운 활력과 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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