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데스크 칼럼] 한국과 미국의 중소기업

정문재 <정보산업부장>

A사장은 한국보다는 미국에서 더 잘 알려진 벤처기업인이다. 이종문 암벡스 회장과 황규빈 텔레비디오 회장이 실리콘 밸리 한인 사회의 1세대 성공 신화라면 A사장은 김종훈 전 유리시스템즈 사장과 함께 2세대 성공 모델로 꼽힌다. A사장은 지난 99년 실리콘 밸리에서 무선 솔루션 업체를 창업한 후 1년여 만에 회사를 굴지의 기업으로 키워 1억5,000만달러에 세계적인 통신장비업체인 B사로 넘겼다. 김종훈 사장이 루슨트테크놀로지스에 유리시스템즈를 매각하면서 받은 10억달러와 비교하면 훨씬 적은 금액이었지만 그는 일약 실리콘 밸리의 ‘스타 벤처기업인’으로 떠올랐다. 횡령등 편법막을 견제장치 미흡 그는 한국에서도 ‘돈을 꿔달라’는 전화가 폭주할 정도로 유명세를 치러야 했다. A사장은 2003년 B사에서 퇴직한 후 다시 벤처기업을 설립했다. 이번에는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다. 그는 한국에서 기업을 하면서 미국에 비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창업자에게 무한책임을 묻는 한국의 거래 및 금융관행이 가장 큰 원인이다. A사장은 “미국에서는 창업자가 자본금 가운데 25%는 직접 대고 나머지는 투자자를 모아 회사를 설립했다가 실패할 경우 자신의 지분만 포기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서 “한국에서는 사장 또는 창업자에게 무한책임을 묻기 때문에 상당한 심적 부담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대다수 중소기업인들은 이런 무한책임 때문에 늘 불안감에 시달린다. 회사가 설비 또는 운전자금을 은행에서 빌릴 때 사장이 개인재산을 담보로 제공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제품을 납품하면서 선수금을 받아도 그에 상응하는 금액에 대해 개인적으로 담보를 서야 한다. 심지어 벤처기업에 투자하면서 ‘회사가 망할 경우 창업주 개인이 투자한 돈을 변제하라’는 조건을 다는 경우도 적지 않다. 금융 및 납품거래의 주체는 ‘법인’이지만 실질적인 책임은 법인이 아니라 사장 개인이 져야 한다. 말이 좋아 ‘법인’이지 중소기업은 사실상 ‘회사라는 이름을 가진 개인’으로 인식된다. 중소기업이 돈을 빌리거나 제품을 납품하는 과정에서 매번 사장 개인의 담보를 요구하는 관행은 일부 중소기업인들의 원죄에서 비롯된 점도 없지 않다. 사례를 찾기 위해 멀리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90년대 말 정보기술(IT) 버블 속에 하루아침에 ‘돈방석’에 앉은 벤처기업인 가운데 일부는 횡령, 분식회계, 내부자 거래 등의 혐의로 감옥에 가거나 해외로 도피했다. 은행원들은 “내부 견제장치가 미흡한 중소기업의 경우 사장의 말 한마디에 회사가 좌우되기 때문에 법인에게 돈을 빌려주더라도 대출위험 관리 차원에서 사장 개인의 담보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처럼 사장 개인에게 엄격한 책임을 묻다 보니 사회 전체적으로 자원이 낭비되는 부작용도 발생한다. 사장 스스로 회사의 사업전망이 어둡기 때문에 청산이 바람직하다고 여겨도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식으로 망할 회사를 끝까지 붙들고 있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자본주의가 제대로 굴러가려면 법인과 법인운영주체의 책임을 분리하되 횡령 같은 운영주체의 불법행위는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엄단해야 한다. '美 투명한 기업환경' 배워야 미국에서는 기업인의 ‘횡령’은 ‘절도’로 간주된다. 임직원의 횡령사실이 적발될 경우 보통 15년은 감옥에서 반성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 절도에 비해 횡령에 대해서는 비교적 너그럽다. 명의신탁 등 온갖 편법을 동원해 돈을 빼돌렸더라도 횡령한 금액만 갚으면 ‘집행유예’로 끝나는 경우도 많다. 빼돌린 돈을 물어주지 않아도 감옥에서 몇년만 견디면 거리를 활보할 수 있다. 이른바 ‘먹고 튀는’ 행태가 반복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정부는 지난해부터 경제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벤처기업 육성대책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이런 대책에 앞서 투명하고 효율적인 기업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 실리콘 밸리에서 아무리 불황이 닥쳐도 우수한 벤처기업이 끊임없이 탄생하는 것은 이런 기업환경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투명하고 효율적인 기업 환경을 조성하지 않으면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공염불에 그칠 뿐이다. timothy@sed.co.kr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