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단됐던 전차경주가 재개된 532년 1월13일, 타원형 경기장에 입장한 비잔틴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평소 같으면 서로 비난하고 야유하기에 바빴던 녹색당과 청색당 지지 관중이 한목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황제의 귀에 들린 관중의 요구는 사면. 파당 간 유혈충돌 사태로 체포돼 교수형에 처해졌으나 밧줄이 끊겨 도망친 녹색당과 청색당원 2명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청원에 황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후 늦게 22번째 경주가 시작될 무렵, 경기장은 관중의 외침으로 가득 찼다. '녹색당과 청색당에 자비를!' 황제는 황급히 도망쳤다. 폭도로 변한 관중은 관공서와 성당에 불을 질렀다. 콘스탄티노플의 30%가 파괴되고 폭도가 새로운 황제를 옹립한 상황에서 황제가 피신을 준비할 때 창녀 출신의 황후 테오도라 황후가 앞을 막고 '황제는 늘 죽음을 준비하는 자리'라며 '끝까지 맞서 싸우자'고 주장했다. 마음을 고쳐 먹은 황제는 지주와 귀족층인 청색당에 금은보화를 풀어 녹색당과 분리하는 한편 군대를 보내 관료ㆍ기술자ㆍ상공인ㆍ농민이 주축인 녹색당 진압에 나섰다. 결국 반란은 8일 만에 끝났다. 시민 3만명이 학살돼 비잔틴제국 1,123년 역사상 가장 큰 소요사태로 꼽히는 니카 반란의 숨은 이유는 종교적 불만과 고율의 세금. 서로 다른 교리를 신봉하는 녹색당과 청색당에 종교토론을 금지시키고 세금을 올린 데 대해 누적된 불만이 초당파적 반란을 불렀다. 반란은 시민 3만여명 학살이라는 기록과 함께 역사에 두 가지 흔적을 남겼다. 세계의 관광객이 몰리는 소피아 대성당이 폭동으로 불타 없어진 옛 성당을 대신하기 위해 건립되고 함무라비 법전, 나폴레옹 법전과 함께 세계 3대 법전이라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편찬작업에 가속도가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