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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중, 급히 가입해 대승리를 기하라!"
대대적으로 회원모집을 시작한 인천 사정 미우회(米友會)의 1929년 8월25일자 동아일보 광고 문구다.
당시 대박의 꿈을 안고 인천미두취인소로 몰려든 투기꾼들에게 회비를 받고 정보를 제공하던 투자클럽이 상당히 많았다. 이 광고를 낸 미우회도 '기미고저통신(期米高低通信)'을 배포했는데 회원이 몰려들자 9월28일 2차 회원모집 때는 회비를 5원으로 두 배나 올렸다.
경성증권취인소 주위에도 증권투자클럽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1922년 3월 일본인 석촌안좌위문(石村安左衛門)이 운영하던 효자동의 '승우회(勝友會)'는 통역으로 엄순성과 안태승을 두고 수십명의 고등외교원까지 고용했다. 승우회도 '주식기미통신(株式期米通信)'을 배포했으나 회비는 무료였다.
이보다 먼저 1920년 6월 인천 빈정에는 '조선경제통신사(朝鮮經濟通信社)'라는 사설 통신사가 생겨 주식과 미두뿐만 아니라 각종 물가정보를 제공하며 일반신탁업을 영위했다.
1937년 11월 개성 원정에 설립된 '남방경제연구소(南方經濟硏究所)'는 조선경제의 전반적인 조사와 함께 회원을 모집해 '증권투자상담'과 '주식기미 투자지도'까지 했다. 특히 예측과 투자가 적중했을 때는 일간지에 대대적인 광고를 하며 매우 공격적인 영업을 했다.
이러한 투자클럽은 회원들에게 각종 투자정보지를 인쇄·배포했다. 초기에는 주식시세와 관련된 경제정보나 총독부의 정책, 미두가에 영향을 미칠 만한 일기예보나 작황·재고 등의 내용이 주를 이뤘으나 시간이 지나며 취인소 주변의 소문도 다수 실리기 시작했다.
1932년 2월부터 인천의 강익하상점에서 배포한 '익정보(益情報)'는 대단히 체계적인 투자정보를 제공했다. 매일 배포되던 노트 2장 크기의 전단지에는 가장 먼저 미두시장의 전반적인 시황이 실렸고 이어 현재의 호재와 악재에 해당하는 '강기(强氣)'와 '약기(弱氣)'가 차례로 등장했다. '투자전략'에 이어 마지막에는 항상 '미두야담(米豆野談)'으로 마무리됐다. 초기의 미두야담에는 증시속담과 격언 등이 소개됐으나 차츰 출처가 불분명한 '카더라 통신'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면서 오늘날 여의도 증권가에 돌아다니는 증권가 정보지로 변질되기도 했다.
특별한 투자기법이 없던 당시의 조선인들에게 '익정보'와 같은 정보지는 중요한 투자의 나침반 역할을 했다. 그러나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다.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허황된 루머를 걸러내고 시장과 기업의 가치를 직시할 수 있는 투자자의 '눈'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