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秘錄, 김우중신화의 몰락] < 제2막> 대우 왜 죽었나

파란눈의 등장’ 운명의 시간은 다가오고… 김우중 회장은 자신의 몰락이 경쟁 업체들의 사주를 받은 선진국들의 음모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주장처럼‘파란 눈’ 들은‘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일까.우리에게‘경제 신탁통치’ 라는 사실을 처음 확인해준 스탠리 피셔 IMF 부총재와 임창렬 부총리의 만남(오른쪽), 그리고 1년 뒤 이뤄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의 회동. 그들의 만남을 보면서 김 회장은 무엇을 느꼈을까. /서울경제DB

[秘錄, 김우중신화의 몰락] 대우 왜 죽었나 클린턴 코드 '파란 눈의 공세' 김영기 기자 young@sed.co.kr 관련기사 • 秘錄, 김우중신화의 몰락 [전체보기] ㆍ클린턴 "재벌개혁 당장 시작하라" ㆍDJ, 클린턴과 회담후 강공 선회 ㆍ"재벌 구조조정 독한 마음갖고…" ㆍ삼성-대우, 보름만에 빅딜 선언 ㆍGM "대우는 무슨 짓이든 할것" ㆍ金회장"IMF체제, 서방자본 음모" ㆍ환경 변했는데도 저돌적 확장 고집 원인(原因)과 결과(結果)는 서로 물고 물린다. 사람들은 인과(因果)의 과정을 찾으려 부단하게 덤벼들지만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30년 넘게 이어졌던 김우중 신화의 몰락. 패망의 원인을 어느 하나로 특정 짓는 것은 참으로 위험 천만이다. 병사(病死)냐, 타살(他殺)이냐를 단칼에 규정하려는 것 또한 과다한 욕심일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성공에서 실패에 이르기까지의 방정식과 이 속에 숨은 함수들을 푸는 일은 분명 필요하다. 그런 작업도 없이 그가 남긴 공과(功過)를 논하겠다는 것은 오만하다. 그가 한국에 머문 시간은 정확히 23시간35분이었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그에게서 찬바람을 느꼈다. 파란눈의 등장' 운명의 시간은 다가오고… 김우중 회장은 자신의 몰락이 경쟁 업체들의 사주를 받은 선진국들의 음모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주장처럼'파란 눈' 들은'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일까.우리에게'경제 신탁통치' 라는 사실을 처음 확인해준 스탠리 피셔 IMF 부총재와 임창렬 부총리의 만남(오른쪽), 그리고 1년 뒤 이뤄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의 회동. 그들의 만남을 보면서 김 회장은 무엇을 느꼈을까. /서울경제DB 국가 부도가 임박한 시점, 스탠리 피셔 국제통화기금(IMF) 부총재가 한국 땅을 밟은 것은 지난 97년 11월20일이었다. 김포공항에 내린 후 곧장 내달은 곳은 다름 아닌 남산 힐튼호텔. 비극을 암시라도 한 것일까. 대우에 패망의 서곡이 울린 99년4월19일,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은 자구 물건으로 “가장 아끼는 것부터 팔겠다”며 힐튼을 첫번째로 내놓았다. 힐튼호텔은 김 회장 부부의 손을 떠나 그렇게 파랑새처럼 날아가버린 것. 아이러니치고는 참으로 고약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오후 4시30분 호텔 1911호실. 피셔가 구제금융의 대가로 내놓은 조건들은 간단명료했다. 재벌들의 부채비율 200% 준수와 부실 금융기관의 정리…. 한국기업이나 국민들이 감당하기에 너무나 가혹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환 곳간이 텅텅 빈 당시 우리에게는 아무런 무기가 없었다. 牡슁?11시30분. 임창렬 부총리는 20분 만에 피셔와 손을 잡고 복도를 걸어 나왔다. ‘IMF 경제신탁통치’는 가혹한 구조조정을 무기삼아 그렇게 시작됐다. 그로부터 정확히 1년 후인 98년 11월21일 오후3시. 경복궁 국립민속박물관에 파란 눈의 거물이 주빈으로 초대됐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었다. 사회는 보스워스 주한 미 대사, 장하성 고려대 교수와 박인상 한국노총 위원장 등 6명이 자리를 함께했다. 클린턴은 대뜸 한국 재벌의 문제점을 놓고 일갈(一喝)했다. “5대 재벌이 구조조정을 시작조차 하지 않고 있다. 당장 개혁을 시작해야 한다. 과거 재벌은 한국의 성장을 위해 적절한 모델이었을지 모르나 상황은 변했다.” 몇 시간 뒤 김대중(DJ)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클린턴은 “재벌을 포함해 모든 구성원이 한국의 경제개혁을 위해 구실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흘 후 청와대. ‘클린턴 코드’가 작동한 것일까. 은행장들은 DJ로부터 엄한 추궁을 들었다. “국민의 정부는 정말 단호한 결심으로 재벌개혁을 늦추거나 봐주거나 하는 일이 없을 것 입니다. 독한 마음을 갖고 임해야 합니다. 5대 재벌의 구조조정을 반드시 연내에 끝내겠습니다.” DJ의 목소리에는 서슬이 서렸다. 보름여가 지난 12월7일. 이건희 삼성 회장과 김 회장은 DJ 앞에서 자동차와 전자간의 맞교환을 선언한다. 김 회장에게 패망의 길을 재촉한 빅딜은 이렇게 탄생했다. 김우중과 IMF, 그리고 그 뒤에 숨은 미국의 힘. 그 사이에 숨은 역학관계는 무엇일까. 대우 신화가 몰락하기 까지는 안팎의 여러 요인들이 함께 했음은 물론이다. 우선 눈을 밖으로 돌리면 패망의 시간에 그들(미국)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혹여 그들이 내민 촉수(觸手)가 김 회장에게 비수(匕首)로 다가온 것은 아닌지. 98년 5월22일 강남 사법연수원. 김 회장은 이날 특강에서 외환위기가 서방자본의 음모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설파했다.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 “재벌 해체론은 선진국이 국내시장을 잠식하고 경쟁 상대인 우리 대기업을 제거하기 위해 내세운 논리다. IMF가 해체론을 내세우는 것도 선진국의 이해가 반영된 것이다. 거대 기업화가 추세인데 우리만 대기업이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본도 국민소득 1만달러 때 기업들의 평균 부채비율이 400%에 달했다.” 미국이 IMF를 내세워 한국 재벌의 ‘무장 해제’를 노리고 있다는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김 회장은 ‘금기(禁忌)’를 깨뜨렸다. 시계추를 93년 말로 돌려보자. 대우센터 25층 비서실에서는 그 이듬해 그룹 광고의 컨셉트을 확정하는 회의가 열렸다. 삼희기획이 내놓은 ‘세계경영’이라는 카피가 눈길을 끈다. 150개에 불과한 해외 네트워크를 갖고 김 회장은 글로벌을 외쳤다. 돈키호테처럼 시작된 세계경영. 김 회장은 5년 만에 해외 네트워크를 법인 396개, 지사 134개, 연구소 15개, 건설현장 44개 등 총 589개로 늘렸다. 95년5월 폴란드. GM과 결별한지 불과 3년 후 김 회장은 폴란드의 국영 승용차 제조사 FSO 인수전에 나섰다. 한수 배우겠다며 몸을 낮추던 주제에서 경쟁자로 나선 셈이다. 5년간 계속된 GM의 협상전은 지루했다. 종업원 구조조정을 하겠다는 GM의 고집에 폴란드 정부는 골머리를 앓았다. 바로 이때 부실기업 인수에 동물적 감각을 지닌 김 회장이 내놓은 제안은 명쾌했다. “단 한 명도 해고하지 않겠다.” FSO 인수의 여세를 몰아 루마니아ㆍ우즈베키스탄ㆍ인도ㆍ체코 등에서 부품ㆍ완성차업체를 잇따라 먹어치웠다. 미국의 최대 적성국가인 리비아까지…. 교과서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경영방식, 경쟁자들은 허둥댔다. 서방세력이 냉전 체제를 무너뜨리자 동구권에 바로 등장한 주역이 생소하기 이를 데 없는 김우중이었다. 김우중은 몽골군의 유럽 침공로를 따라 동구시장을 돌파하고 서구시장 침공을 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김 회장의 이름 뒤에 화려한 수식어들이 따라붙었다. ‘한국의 용’ ‘킴기즈칸’(20세기의 칭기즈칸)….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저돌적인 킴기즈칸의 세계경영은 그만큼 강한 역풍도 몰고 왔다. GM은 물론 벤츠ㆍBMWㆍ르노까지 나서 ‘타도 대우’를 외치는 분위기였다. 96년 2월 하순. 오스트리아 슈타이어사는 “대우와 94년 체결한 의향서가 파기됐다”고 발표했다. 자동차 관련 4개 사업 부문의 지분 65%를 인수하기로 한 계약이 통보도 없이 깨져버린 것. 당시 측근이었던 대우 계열사 사장인 A씨는 김 회장의 주변에 토로했던 불만을 이렇게 전했다. “말도 안돼. 유럽 업체들이 뒤에서 교사한 게 틀림없어.” 견제는 본격화됐다. 미국식 경영체제에서 김우중은 ‘이단아’였다. 동구권 국가 원수들과 만나 하루아침에 인수협상을 타결짓는 모습에 파란 눈들은 ‘정경유착의 세계화’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한국산 자온汰?수입억제를 재임 중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96년 1월 유럽자동차 제조업자 단체 회장) 시장을 무자비하게 포획해나가던 96년. 대척점에 섰던 GM의 루 휴즈 국제영업 부문 사장의 발언은 적개심마저 느낄 정도로 격렬했다. “대우는 매우 파괴적인 세력으로 시장창출을 위해라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IMF 신탁통치가 시작되자 한국기업들에 대한 견제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IMF의 사실상 주인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은 IMF에 대한 추가 출자금이 포함된 99년 예산을 통과시키면서 특히 한국을 지목, 자동차 등 5대 산업에 IMF 구제자금이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전제조건을 달았다. IMF가 99년 작성한 보고서에는 한국의 재벌 내 기업간 네트워크를 해체하는 방안이 포함됐다. 재벌 해체를 의미하는 대목이었다. ‘파란 눈’은 재벌 가운데에서도 유독 대우에 유별난 관심을 보였다. 98년 구조조정이 한창이던 당시 만난 고위 관료는 이렇게 말했다. “외국 애들을 만나기만 하면 다들 대우 얘기뿐이야. 하기사 대우 부채비율이 500%를 넘으니 할 말도 없지만….” 전직 대우 금융계열사 임원의 푸념섞인 발언. “IMF 체제는 세계경영의 기치를 내걸 때 척을 졌던 자들에게 좋은 공격의 구실을 주었지요. 해외투자에 성공하려면 7~8년의 과도기가 필요한데 대우는 공교롭게도 그 시기에 IMF를 맞았습니다.” 그렇다고 ‘음모론’만으로 대우 해체를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외국자본의 공격 명분을 제공하고 몰락의 구실을 준 것은 다름 아닌 김우중 자신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대우의 체질은 너무나 허약했다. 80년 초 입사한 전직 대우 임원의 회고를 듣다 보면 세계경영 뒤에 숨어 있는 대우의 또 다른 단면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90년대 중반 브레이크를 밟을 필요가 있다는 지적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기술력을 키우고 재무구조를 탄탄히 해 내실을 다지자는 주장이었지요. 하지만 당시 그런 것들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대개가 배척당하고 말았어요.” 오호근 전 기업구조조정위원장도 지적도 의미심장하다. “김 회장은 기업가라기보다는 차라리 협상가이자 상인이었습니다. 60년대 후반 70년대에는 상인기질과 탁월한 협상술로 성공을 거둘 수 있었지만 기업가로 변신해야 할 80년대 이후에도 과거의 모습 그대로 머물렀던 게 실패의 요인이었다고 봅니다.” 유랑생활 도중 김 회장은 “정부가 모든 규칙을 바꿔버렸다”고 말했다. 그 규칙은 파란 눈의 사나이들에 의해 반 강제적으로 변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상 변한 것은 게임(환경) 그 자체였다. 파란 눈들이 게임을 바꿨을 때 그 게임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파악하지 못한 것은 김우중 자신이었다. 입력시간 : 2005/06/19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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