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적인 투기꾼 칼 아이칸과 그의 동료들이 KT&G에 대해 적대적 인수 및 합병(M&A) 공세를 펼치면서 국내 여론이 들끓고 있다.
국수주의적 관점에서 한국의 상징인 인삼산업을 외국에 빼앗겨서는 안된다며 토종자본이 나서라는 주장이 있다. 또 투기세력의 공격에 노출된 것은 공기업 시절의 고루한 경영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KT&G 경영진에 책임이 있다는 시장론자의 주장이 있다.
외자유치 급급 헐값에 넘겨
여기서 공기업 민영화 또는 국영기업의 매각에 문제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작금의 KT&G 사태는 전신인 담배인삼공사의 무리한 매각에서 비롯된다. 지난 99년 11월 재경부는 10억 달러 규모의 공사 해외예탁증서(DR) 발행을 추진하면서 해외투자자들이 가격 할인을 요구하자 로드쇼 도중에 하차했다.
프리미엄을 얹어서 발행하겠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2년을 기다리며 선택한 시기가 2001년 10월 24일이었다. 미국 경기가 침체한데다 9ㆍ11 테러까지 당해 뉴욕증시가 극도의 혼돈에 빠져 있는 상황에 정부는 굳이 담배인삼공사 지분 20%를 매각했다. 그때 물량의 절반밖에 DR로 소화하지 못하고, 나머지는 일정기간마다 이자를 물어야 하는 교환사채(EB) 조건으로 겨우 매각했다.
두번째 매각시기도 국제시장이 극도로 악화했을때였다. 2002년 10월 9일 정부는 담배인삼공사 매각 예정 물량 2,633만주(14.5%) 가운데 70%만 원주가격에 팔고, 나머지 30%는 담배인삼공사에 떠넘겼다. 그렇게 해서 조달한 금액이 2억3,000만 달러로, 2002년 9월 발표당시 예상금액 3억7,000만 달러의 60%에 불과하다. 공사의 자사주취득분 물량(1억 달러)을 합쳐도 10% 이상 헐값이었다.
정부 당국자들은 주가가 좋을 땐 공기업 매각에 배짱을 부리다가, 주가가 나쁠땐 허겁지겁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정부가 경영권 방어 장치를 하지 않은채 외자유치에 급급해 공기업을 외국에 헐값 매각했던 것이다.
지금 투기세력의 타깃이 되고 있는 기업의 상당수가 포스코처럼 공기업에서 민영화한 기업들이다. KT&G만 해도 기간산업이라 하기 어렵고, 아이칸의 공격은 초보적 수준에 불과하다. 중요한 점은 앞으로 나올 우리은행과 기업은행의 정부 지분 매각에서는 담배인삼공사 지분 매각시의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은행은 경제에 있어 국방이나 치안과 다름없다. 평화시에는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위기가 닥쳐올 때 은행은 경제 안정의 마지막 보루로서의 역할을 한다.
우리은행은 지분 78%가 국민의 세금(공적자금)으로 구성된 국영 은행이다. 정부는 공적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단계적 민영화 스케줄을 가지고 있는데, 한국 내에서는 우리은행을 인수할 자금주를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재벌 그룹의 은행 소유권이 제한돼 있고, 덩치 큰 우리은행을 인수할 만큼의 자금 여력이 있는 중견은행을 찾기 어렵다.
은행등 경영권 방어 전략시급
한국보다 2년 앞서 외환위기를 겪었던 멕시코의 경우, 처음에 5위권 밖의 은행을 매각했다가 곧이어 4~5위 은행도 팔고, 마침내 3위권 이내도 해외에 매각해 대형 은행 가운데 멕시코인이 주인인 은행이 없다. 한국은 국가 재정이 건실하고, 외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상업은행들의 수익이 크게 개선돼 멕시코와 비교할수 없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 은행의 경영권 방어는 경제 주권의 수호라는 관점에서 신중하게 논의하고 참여를 유도해야 할 이슈다. 담배인삼공사 지분 해외매각을 거울삼아 정부는 공적자금 회수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시중은행의 경영권을 국내에 유지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미국의 시티은행이 80년대에 어려웠을 때 사우디의 왈리드 왕자에게 일정 지분을 내주고 자금 수혈을 받으면서도, 경영에 간여하지 않는다는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했던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