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6월24일] 베를린 봉쇄

3차 세계대전의 경보가 울렸다. 1948년 6월24일 소련이 베를린을 봉쇄했기 때문이다. 베를린은 소련 점령지 한복판이었지만 얄타회담에서 정한 대로 미국과 영국ㆍ프랑스 등 서방 3개국과 소련이 분할 관리하던 독일의 수도. ‘붉은 바다의 외딴 섬’ 격인 서베를린으로 가는 통로가 끊기자 미군은 핵폭탄 탑재 폭격기를 영국에 배치하는 등 비상대기에 들어갔다. 일촉즉발의 상황을 야기한 것은 돈. 서독 지역에서 단행한 화폐개혁을 서베를린에도 적용한다는 서방 3개국의 방침을 소련은 ‘통화를 매개로 한 침략’으로 여겼다. 마침 대규모 유럽 원조계획인 마셜플랜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터, 소련은 길을 막으며 서베를린과 서방 3개국의 목을 졸랐다. 생명줄이 끊긴 서베를린은 바로 아사 위기에 빠졌다. 미국은 탱크를 앞세운 무력시위로 육로를 뚫는 강경 대응책을 검토하다 대규모 공수작전으로 방향을 돌렸다. 소련이 베를린 근방에 40개 사단을 배치시켜 전운이 높아지는 동안에도 수송기는 쉴 새 없이 보급품을 날랐다. 서방진영은 동구권 국가의 수출품에 대한 수입금지 등 역봉쇄 전략도 펼쳤다. 소련은 결국 1949년 5월 봉쇄를 풀었다. 봉쇄기간 중 공수 횟수는 연 27만7,728회. 식량에서 연료와 생필품, 심지어 신문용지까지 총 234만3,300톤의 물자가 250만 서베를린 시민을 먹여 살렸다. 보급에 들어간 비용은 2억2,400만달러. 요즘 가치로 31억달러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돈의 기준 때문에 시작된 베를린 봉쇄를 돈의 힘으로 넘은 셈이다. 미국이 탱크로 맞서는 강경책을 택했다면 인류는 존재할 수 있었을까. 베를린 시민들이 ‘사탕폭격기(Candy Bomber)’라고 불렀던 구호품 수송기의 위력은 핵폭탄보다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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