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월20일] 國共합작

세계의 자본과 원자재를 빨아들이며 성장하는 중국. 광활한 영토와 거대한 인구가 분열되지 않고 통일체를 유지하는 단초는 8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대는 1924년 1월20일 열린 국민당 제1기 전국대표회의. ‘연소(聯蘇)ㆍ용공(容共)ㆍ농공부조(農工扶助)’의 3대 강령 채택으로 제1차 국공합작이 성립됐다. 중국의 통일과 근대화를 막는 군벌과 배후의 일본에 대항하자는 좌우동거는 3년반 만에 깨졌다. 좌파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장제스(蔣介石) 측의 친위 쿠데타는 10년간 국공내전의 신호탄이었다. 홍군(공산군)은 일방적으로 밀렸지만 끝까지 버텼다. 국민당군에 쫓긴 10만명의 홍군이 18개의 산맥을 넘고 24개의 강을 건너 서북부에 안착했을 때 남은 병력은 불과 8,000명. 대장정(大長征)으로 내부 결속력을 다진 홍군과 국민당군의 내전이 일단락된 것은 1937년 8월. 중일전쟁이 2차 국공합작을 낳았다. 중국의 저력은 강했다. 3개월이면 충분하다고 큰소리쳤던 일본은 수렁에 빠졌다. 일본군 105만명의 발이 중국전선에서 묶이지 않았다면 태평양전쟁의 양상이 변할 수도 있었다. 30만명이 희생된 난징대학살을 포함해 2,00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끝에 중국은 승리를 얻었다. 승전 후 봉합됐던 실밥이 터졌다. 국공내전의 재연이다. 20억달러가 넘은 미국의 지원으로 170만의 군대와 11만톤의 군함, 600여대의 비행기를 갖춘 국민당군은 빈약한 무장의 40만 팔로군에게 무너졌다. 일인독재체제하의 부정과 부패 탓이다. 2년 동안 천배 이상 오른 인플레이션도 패배를 부추겼다. 국민당이 대만으로 쫓겨나고 대륙은 통일됐다. 국공합작이 없었다면 오늘날 중국은 군웅이 할거하는 분열된 나라로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권홍우ㆍ경제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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