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秘錄, 김우중신화의 몰락] <2장> 刑場은 꾸려지고

98년말 워크아웃 등 사전검토 착수<br>99년 4월9일 외신"지급불능상태" 보도<br>4월14일 DJ '워크아웃' 옐로카드<br>4월17일 구조조정 보고서 靑제출<br>4월19일 김우중, 자구계획 발표

99년 4월19일, 그 대립의 곡선은 극단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살기 위한 몸부림이, 다른 한편에서는 일을 끝맺음하려는 움직임이 한창이었다. 이날 서울역 대우빌딩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는 패망을 앞둔 김우중 회장의 자구책 발표(왼쪽)와 수습 방안을 찾기 위한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과 은행장간 회동이 점심과 저녁에 걸쳐 잇따라 열렸다. /서울경제 DB

[秘錄, 김우중신화 몰락] 刑場은 꾸려지고 "대우해체, 98년말부터 예고됐다" 김영기 기자 young@sed.co.kr 관련기사 • 秘錄, 김우중신화의 몰락 [전체보기] ㆍ98년말 - 워크아웃 등 사전검토 착수 ㆍ99년 4월9일 - 외신"지급불능상태" 보도 ㆍ4월14일 - DJ '워크아웃' 옐로카드 ㆍ4월17일 - 구조조정 보고서 靑제출 ㆍ4월19일 - 김우중, 자구계획 발표 비록 관료들과는 척을 졌지만 김우중은 그들이 등을 돌리지 않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90년대가 끝나 가는 무렵, 그에게 친구는 없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최고 통치권자에 미련을 가졌지만, 시대는 너무나도 낯설게 변하고 있었다. ‘김우중 없는 대우’가 준비되고 있었던 것. 시장은 너무나도 영악하게 눈치를 챘다. 그를 짓누르는 외로움도 컸겠지만, 대우를 엄습한 병마는 그룹 전체에 전염돼갔다. 설마 설마 하는 사이에 의사들은 칼을 든 채 수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생명의 끈을 부여잡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허사였다. 패망의 시간은 이렇게 찾아오고 있었다. “말로만 하겠다고 하지 말고 어떻게 빚을 갚을 것인지를 보여주세요.” (류시열 행장) “파는 게 능사가 아니잖소. 제값을 받아야죠. 금융기관들이 앞다퉈 회수해가는데 주채권은행은 뭘 하는 겁니까.”(김우중 회장) 백발의 류시열 제일은행장. 그는 경기고 시절부터 천재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은행감독원에서 공직을 마무리짓고 시중은행에 발을 내밀었지만 억세게도 운이 없었다. 따라온 것은 부실책임밖에 없었다. 대우는 그런 그를 더욱 옥죄었다. 99년 4월15일 이른 아침. 류 행장은 굳은 결심을 했다. 어떤 식으로든 결판을 내야 할 판이었다. 곧장 대우센터가 있는 서울역 앞으로 향했다. 대우센터 25층에 자리잡은 김 회장 집무실은 여느 때처럼 조용했다. 온화하다는 평을 듣는 류 행장이었지만 이날만은 달랐다. 목소리 톤은 높았고 단호했다. “돈 될 만한 것을 내놓으시지요.” 그날 오후. 김 회장은 갑작스레 프랑크푸르트로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대우 문제는 국내만이 아니라 해외법인에서도 이미 거센 불길이 일고 있었던 때였다. 관료에 이어 주채권은행마저 등을 돌리다니…. 김우중의 고립감은 점차 깊어만 갔다. 어쨌든 류 행장을 그토록 다급하게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시계추를 98년 말로 돌려보자. 당시 대우 부채는 말 그대로 눈사태처럼 늘어났다. ㈜대우 부채는 97년 말 11조원대에서 98년 말 22조원대로 불어났다. 원화 단기차입금은 97년 2조7,700억원에서 이듬해 9조8,513억원까지 폭증했다. 그러나 웬걸, 자산 역시 일년 사이 25조원이나 늘며 재계 2위로 올라섰다. ‘부채도 자산’이라는 외상 경영론은 독이 돼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쫓기는 자외 쫓는 자99년 4월19일, 그 대립의 곡선은 극단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살기 위한 몸부림이, 다른 한편에서는 일을 끝맺음하려는 움직임이 한창이었다. 이날 서울역 대우빌딩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는 패망을 앞둔 김우중 회장의 자구책 발표(왼쪽)와 수습 방안을 찾기 위한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과 은행장간 회동이 점심과 저녁에 걸쳐 잇따라 열렸다. /서울경제 DB 시중은행 여신 담당자의 증언 한 토막. “99년 들어서면서 대우의 빚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어요. 세계경영을 표방한 후 해외법인을 대거 설립한 탓에 나라 밖 빚이 많았지만 주채권은행인 제일은행에 물어봐도 모른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돌아오더군요.” 대우 문제에 관여했던 정기홍 전 금융감독원 부원장(현 서울보증보험 사장)의 회고는 좀더 구체적이었다. “98년 10월 회사채 발행한도에 캡(한도)을 씌우자 연말부터 대우가 사채시장을 찾는다는 소문이 확 퍼졌습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과연 대우의 몰락이 언제부터 그 확실한 시그널을 보여주기 시작했냐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정부의 구조조정 작업에 참여했던 한 고위인사의 증언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98년 말부터 큰 숫자를 갖고 대우가 어떻게 될지 검토했다. 시간이 갈수록 기업가치는 빨리 줄어들게 되니 워크아웃을 한다면 빨리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98년 말과 99년 봄, 초여름, 그렇게 세 차례 검토작업이 있었다. 다만 겉으로 드러난 숫자여서 의견을 강하게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의 말은 결국 대우의 ‘사형 집행(워크아웃 결정)’이 이뤄진 것은 99년 8월26일이지만, 형장이 꾸려지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9개월 전이었음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이런 와중?김 회장은 삼성과의 자동차 빅딜?GM과의 협상, 두 곳에서 자신의 생명줄을 발견했다. 대우가 사실상의 부도 상태에 빠져든 99년 4월. ㈜대우는 숨이 턱턱 막히는 압박감에 조금씩 무너져갔다. 기업어음(CP) 만기는 일주일 단위로 수조원씩 몰려왔다. 시장에는 ㈜대우 화의설과 대우증권 매각설까지 나돌았다. 4월9일자 아시아위크지는 대우그룹이 사실상 ‘지급불능상태(Insolvent)’에 빠졌다고 보도했다. 13일에는 S&P까지 나서 ㈜대우의 신용등급을 B-로 강등시키며 빈사지경인 환자의 목을 죄었다. 외국 은행의 무차별적인 대출 회수가 이뤄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국내 은행에서 ㈜대우에 흘러들어온 돈은 언제부터인지 들어오는 족족 사라졌다. 대우가 수출대금을 받아 외국 은행에 개설된 현지법인 계좌에 입금하면 외국 은행들은 곧장 자신들의 빚과 상계시켰다. 국내에서 조달한 회사채 자금도 곧바로 외국 은행으로 흘러갔다. 김 회장을 형틀에 묶이게 한 외화밀반출의 죄목은 갈수록 커져갔다. 전직 대우 인사의 고백이 이채롭다. “뭔가 보이지 않는 마귀의 손이 작용하는 듯했다. 피하기 위해 발버둥을 쳐 보았지만 소용 없었다. 마치 속을 알 수 없는 늪에 빨려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대우의 패망은 이렇게 워크아웃 넉달 전인 4월 사실상 결론지어졌다. 당시 여당 ‘경제통’이었던 김원길 의원은 훗날 “대우가 추가 구조조정 방안을 발표했던 4월19일 무렵에는 워크아웃 방침을 결정해야 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생명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 법. 99년 4월14일, 기자회견장에 나온 김대중(DJ) 대통령은 “5대 그룹도 워크아웃될 수 있다”며 김 회장에게 옐로 카드를 내밀었다. 정부 고위당국자의 회고. “대우 한계치는 이미 대통령에게 보고됐습니다. 어쩌면 대통령은 4월19일로 예정된 대우의 구조조정 발표를 앞두고 숨고르기를 했고 워크아웃에 넣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낸 셈이었습니다.” 김 회장과 오랜 밀월을 유지해왔던 DJ, 그가 10년 지기에게 준 마지막 기회였을까. DJ는 곧바로 레드 카드를 꺼내지는 않았다. 김 회장과 격렬하게 대척했던 강봉균 수석도 “특정 재벌 전체 계열사에 대한 워크아웃이 아니라 단위기업별로 워크아웃 대상이 선정될 수 있다는 뜻”이라고 김 회장을 위하는 매무새를 취했다. 계속되는 이 당국자의 회고. “대우를 수술할 준비가 덜 돼 있었다. 무방비 상태에서 망가지면 은행에서 넣은 수십조원이 허공에 날라갈 게 뻔했다. 물론 윗분(DJ)의 의중도 감안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4월 중순. 대우 위기를 진단하는 보고서가 정부에 잇따라 올라갔다. 금융연구원이 4월17일 청와대 등에 올린 ‘대우 워크아웃의 경제적 영향’이란 대외비 보고서에는 이런 대목이 실려 있다. “대우자동차에 대한 워크아웃이 시행되면 대외신인도에 악영향을 미치는 효과보다 구조조정 관련 불확실성이 제거되면서 해외자본의 한국 진출을 촉진시키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형틀을 만드는 관료들의 움직임은 빨라졌다. 소식은 대우에도 들어갔다. 류 행장과의 면담 후 독일로 떠났던 김 회장은 예정을 앞당겨 4월18일 오후 김포공항에 돌아왔다. 곧바로 서울역 앞 대우빌딩으로 향했다. 대기 중이던 핵심계열사 사장들이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탁자 위에는 자구 방안이 담긴 수십 장의 서류가 널부러져 있었다. 4월19일 오후5시10분. 김 회장은 다소 지친 표정으로 대우그룹 본사 5층에 마련된 기자회견장에 나타났다. 김태구 구조조정본부장, 정주호 회장 부속실장, 장병주 ㈜대우 사장 등이 함께했다. 대우의 연금술사들이었다. 핵심 계열사 매각을 통한 9조1,415억원 조성, 대우중공업 조선 부문 일본에 매각, 그리고 부인이 애지중지하는 힐튼호텔까지…. 백화점식 자구책이 쏟아졌다. 흥미로운 점은 대우자동차에 대한 김 회장의 집착(?)이었다. 그는 자동차전문그룹으로 태어나겠다는 뜻을 되풀이했다. 이례적으로 GM과의 협상과정도 자세히 설명했다. 대우의 마지막 승부수를 GM에 걸고 있는 듯한 인상을 누구에게도 숨길 수 없었다. 그만큼 절박한 모습이었다. 여의도 금감위 기자실. 김 회장의 기자회견이 끝나자마자 이헌재 위원장이 내려왔다. “김 회장이 큰 결단을 내렸다. 구조조정은 방향도 제대로 설정됐고 실현 가능성도 높다.” 자구안을 정말 신뢰한 것이었을까. 당시의 한 시중은행 임원은 “(이 위원장의 오른팔이었던) 서근우 금감위 심의관 등은 빨리 워크아웃에 들어가는 것밖에 방법이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대우 해체를 준비할 작업이 마무리될 때까지 최대한 버텨주기를 바랐다는 게 솔직한 속내였을 것이다. 시간은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구조조정의 바통은 김 회장이 그토록 싫어했던 관료들에게 넘어갔고 그는 이제 수술대 위의 환자일 뿐이었다. 이진순 KDI 원장과 이동걸 당시 금융연구원 은행팀장이 대우의 ‘테크니컬 디폴트(기술적 부도)’를 알리기 위해 이기호 신임 경제수석을 찾은 것은 그로부터 보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 이규성 재경부 장관이 KDI에 대우 처리방향에 대한 용역을 준 것도 이때였다. ‘대우그룹 구조조정 평가 및 개선방안’이란 KDI의 내부 보고서(6월11일)는 대우 수술작업이 이미 무르익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4월 발표대로 구조조정이 추진돼도 기술적인 부도상황은 계속될 것이다. 제3자 위임방식으로 신속ㆍ확실하게 추진해야 한다. ㈜대우ㆍ대우자동차 등 규모가 큰 계열사는 워크아웃과 매각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대우 해체의 마지막 시간은 속속 다가오고 있었다. 입력시간 : 2005/06/14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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