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이제는 서해안 시대다] 인천항 연안해운의 역사

경인선 개통후 대항구로 급속 발전… 해방후 운송 비중 점진적 위축

고려 때부터 시작된 조운제도(漕運制度)는 각 도에서 국가에 내는 전세(田稅)나 대동미(大同米)를 중앙으로 운송하던 제도로 가장 조직적이고 규모가 큰 수상교통체계로 널리 알려져 있다. 현대에는 이를 연안해운이라고 부른다. 내륙수로를 이용할 경우 수운(水運) 혹은 참운(站運), 바다를 이용할 경우 해운(海運)이라고 한다. 조선은 특히 국가 재정의 많은 부분을 전라도에서 나오는 세곡(稅穀)에 의존했기 때문에 해운을 중시했다. 인천항 역시 조운에 있어 중요한 해상교통로로 큰 역할을 담당해 왔다. 조선 후기 주요 항만이던 인천의 성창포(城倉浦), 지금의 동구 만석동 일대는 삼남(三南)지방에서 조운선이 험난한 염하(鹽河,강화군과 경기도 김포시 사이의 해협)를 통과하기 전의 마지막 기항지로 많은 선박들이 집결했으며 성창포 부두는 외해의 풍랑으로부터 선박을 보호하기도 했다. 1883년 인천항 개항 당시에도 전운서(轉運署)가 설치되는 등 육상과 해상의 주요통로였으며 인천항은 조운선이 서울로 향하는 조운수로의 길목에 위치하는 매우 중요한 요충지이기도 했다. 인천항은 수도 서울의 관문인 동시에 중부지방을 세력권으로 하는 서해안 최대의 무역항이었으며 조선시대 말까지 제물포라는 작은 어촌에 불과 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개항 이후 경인선이 설치되면서 서울의 외항으로 급속하게 발전했으며 자연조건이 불리한데도 불구하고 인공적 시설을 갖춰 대항구로 발전했다. 이러한 인천항의 발전과 함께 1899년 경인선의 개통과 경부선, 경의선, 호남선 등으로 1930년대 X자형 기본 철도망이 구성돼 항만과 철도의 발전이 이뤄지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이뤄진 이러한 철도망의 건설은 주로 우리나라 자원의 수탈을 위해 내륙의 주요 도시나 농업 중심지, 북부산간 지원 산지와 항구를 연결하는 데 집중되기도 했다. 해방 이후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5차레에 걸쳐 추진되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국가철도망의 새로운 노선 추가와 복선화, 전철화, 현대화 등 시설개선이 이뤄졌다. 단군이래 최대의 역사(役事)라고 불리는 경부고속도로 개통을 비롯, 1960년대 이후부터는 도로와 철도가 국내 운송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며 우리나라 산업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우리나라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 할수록 조운(漕運), 즉 연안해운의 비중은 점차 낮아졌으며 오늘날에는 항공과 철도, 고속도로 등 첨단 교통시설의 발달로 그 역할이 많이 위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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