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봉균 열린우리당 정책위의장이 지난 20일 오전10시 조금 넘어 국회 브리핑룸에 왔다. 그는 이날 경제4단체장과의 오찬간담회서 할 말을 A4 용지에 정리해 배포하고 9일 밝혔던 자신의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 발언과 관련, “출총제는 지배구조 개선이 취지인데 순환출자를 막기 위해 존속해야 한다는 (공정위의) 논리는 맞지 않는다는 얘기였다”고 해명했다.
‘폐지’란 단어는 문맥에서 빠졌다. 그는 이어 “중소기업 지원 등 상생의 노력을 보여줘야 출총제를 폐지할 수 있다는 얘기를 간담회에서 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여당 정책위의장이 간담회에서 할 말을 사전 브리핑 한 것은 17대 국회 들어 처음이다. 특히 강 의장은 사안이 결정되기 전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9일 강 의장은 “출총제를 폐지하는 게 좋다”고 해 출총제 존폐 논란에 본격적인 불을 붙인 장본인. 열하루 만에 강 의장이 직접 나서 자신의 발언 수위를 조절한 데는 이유가 있다.
강 의장의 출총제 폐지 발언 직후 경실련 등 시민단체는 “열린우리당의 개혁 성향이 후퇴한 것”이라며 비판했다. 16일 중소기업과의 간담회에서도 강 의장의 출총제 폐지 입장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컸다. 급기야 강 의장은 20일 경제4단체장 간담회에서 “양극화 해소에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출총제 폐지에 대한 일종의 전제조건을 달았다.
강 의장과 함께 출총제 폐지에 앞장섰던 채수찬 정책위 부의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폐지하더라도 ‘단계적으로 장기간에 걸쳐서’”라고 했다. 폐지 입장에 변함은 없었지만 방점은 뒤에 있었다. 노웅래 원내공보부대표는 간담회 브리핑에서 “(출총제를) 일시에 폐지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른바 시장주의자들이 마치 입을 맞춘 듯 출총제 폐지 문제에 대해 한발 빼는 것 같아 노 공보부대표에게 “지도부가 입 단속 한 것인가”라고 물었더니 그는 “얘기가 나왔었다”고 밝혔다.
참여정부 후반, 경제성장이 주요 과제가 되면서 커지고 있던 당내 시장주의자들의 목소리가 5ㆍ31 지방선거 앞에서 잠시 주춤하고 있는 형국이다. 당의 정체성이 정치일정에 따라 좌로 갔다 우로 갔다 하는 사이 재계에선 “장단 맞추기 힘들다”란 얘기가 나온다.